1970년대 초반, 우리는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우리도 세월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중(中)에서 고(高)로 학교 위상이 바뀌자, 이번에는 대학 진학에 대한 중압감이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1학년 학생이 당장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매진한 것은 아니다. 당시 대학입학 관문인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3년 가까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내신 성적은 중요하지 않아 학교수업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학생들이 하루 종일 송충이 잡이에 나설 정도로 시간적,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마음이 천리면 가까운 지척도 천리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조만간 우리의 마음속에는 대학입시라는 광풍이 휘몰아치겠지만, 아직까지는 평온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고등학교 입학한 후에도 주말과 방학 때엔 농사일을 돕고, 틈틈이 책을 펼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밤새워 보리타작한 다음날,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다가 선생님께 회초리로 사정없이 뒷덜미를 두드려 맞은 적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발동기 엔진오일로 새까매진 손을 슬그머니 내밀면서 선생님께 무언의 양해를 구하곤 했다.
고2로 진학하자 주변의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교실의 분위기부터 변했다. 급우들은 각기 자신이 희망하는 대학의 입시요강에 맞춰 서서히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도 우선 영어, 수학부터 공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영어와 수학 참고서를 사서 정독하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도 늦게 끝나 기차통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20인승 정도의 마이크로버스라는 교통수단이 새로 생겼지만, 승객이 많고 배차간격도 길어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버스가 워낙 작아 나처럼 키 큰 사람은 상체를 90도로 구부린 채 타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도 대체 교통수단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아버지를 졸라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다. 편도 10여 km 되는 등교 길을 자전거로 통학할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반대하셨다. 차들이 오가는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이 극히 위험했기 때문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아버지는 결국 새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해 주셨다. 차 조심 하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자전거 통학 길에서 만들어진 에피소드도 다양하다. 기교 부린답시고 핸들에서 손을 뗀 채로 내리막길을 내려오다 길가 코스모스 꽃밭에 처박힌 것까지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몸을 추슬러 일어나 보니 하얀 교복에 코스모스 꽃무늬가 점점이 박혔다. 겨울철에는 손발이 시려 커다란 벙어리장갑과 정글화를 착용해야 했다. 학교 기율이 엄격했던 시절, 학생이 군화를 신고 학교에 등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밝히는 법이다. 어느 초겨울 아침, 학교에 도착하여 자전거를 세우다가 내 모습을 본 교련선생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한 말씀하셨다.
“이 녀석 봐라, 군화를 신고 학교에 오다니...”
“자전거 타고 다니려니 발이 너무 시려 신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씩 웃으시더니,
“대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교련 선생님은 내 학교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신 듯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군화와 군용 벙어리장갑 교내 착용을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거나 다름없다. 그날 이후로 나는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처럼 군용 피복 차림으로 학교를 활보하고 다녔다.
고2 시절, 우리 학급에서 일어난 사건 중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이 출석을 부른 후 교실에 있는 학생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출석부상 출석학생 숫자와 실제 학생숫자가 일치하지 않은 걸 확인한 선생님은 이 사실을 우리 반 담임 선생님에게 통보하였다. 종례시간에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담임 선생님은 몹시 화난 얼굴로 우리에게 고함쳤다.
“국어시간에 대리출석한 놈 나와”
교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선생님이 재차 소리쳤으나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1번부터 차례대로 나와”
키 큰 순서로 학번을 부여하던 제도에 따라 덩치 큰 녀석들이 맨 먼저 불려 나갔다. 몸집이 작은 선생님은 학생들을 올려다보며 뺨 5대씩을 선물하였다. 60여 명 중 두 번째인 나는 발산개세(拔山蓋世)의 경지에 이른 선생님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나의 뺨에는 선생님의 증오의 불꽃이 일고 실망의 손자국이 새겨졌다. 겨우 20번 학생까지 선물꾸러미를 풀어놓은 후 선생님은 제풀에 지쳐 교실 문을 나가버렸다.
잠시 후 한 학생이 교단에 올라가서 급우들에게 사과를 했다.
“친구들, 미안하게 됐다. 내가 대리출석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급우가 무단조퇴를 하자,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위해 대리출석을 한 것이다. 교단에 선 친구에 대해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담임 선생님도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화가 많이 풀렸으리라.
학교 주위의 산이 붉은 단풍잎으로 물든 가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도 끝나가고 있었다. 하루는 우리 반 반장이 아침부터 담임 선생님께 호출되어 나갔다. 한참 후에 교실로 돌아온 반장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사건현장에 참고인 자격으로 호출되었던 것이다. 학교 건너편 야산에서 불에 탄 주검이 발견되었는데, 타다 남은 운동화의 끈 엮은 모양이 우리 학교의 공식 양식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주검은 우리 반 급우로 판명되었다. 평소에 말이 없던 그는 우리보다 서너 살이나 많은 늦깎이 학우였다. 나이가 많아 수년 내에 군 입대를 해야 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카프카(F. Kafka)의 말처럼, 삶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다.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입대해야만 하는 당시의 융통성 없는 현실이 한 젊은이의 소중한 인생을 끝내고 말았다. 그 시절에는 고등학교마저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고3이라는 운명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