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망각이라는 기능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상(事象)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듯이, 이 기능에도 두 속성이 양립하고 있다. 자기를 잊지 말라고 햄릿에게 애원하는 오필리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망각되지 않기를 바란다. 반면, 아무리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망각하게 되는 긍정적인 기능도 있다. 망각이 가진 이 순기능에 따라, 나도 두 번째 낙방의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2월 중순 무렵, 나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원하는 대학에 한 번 더 도전을 하든지, 후기 대입시험을 치러 다소 낮은 수준의 대학에 다닐 것인지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인간이 지닌 또 다른 속성 중의 하나는, 한 번 높아진 눈높이는 좀처럼 낮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기업 취업에 실패한 대졸자들이 중소기업 취직에는 부정적이거나, 배필을 구하려는 구혼자들이 계속 높은 수준의 배우자를 찾는 현상은 이러한 속성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 역시 눈높이가 높은 필부(匹夫)였다. 어떤 면에서는 필부보다 못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내가 지닌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대학을 포기한 채, 마음에 없는 대학을 가기는 싫었다. 도전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의사결정을 내리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한 번 더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쩌면 이미 정해진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두 가지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의사결정의 한 예로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나의 결정은 높아진 눈높이로 인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만약 내년에도 시험에 실패하면, 나이가 차서 군에 입대해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 진퇴양난에 처한 나에게는 이젠 어떤 대안도 없었다. 부모님께는 1년만 더 뒷바라지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걱정하는 가족들을 뒤로한 채, 이번에는 일찌감치 3월 말에 상경하였다. 다시 학원에 등록하여 수험준비에 들어갔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학원에서 책과 씨름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날씨가 무더운 여름이 되자, 식욕이 떨어지는 고비가 찾아왔다. 결핵이라는 병의 가장 흔한 증상이 식욕부진이기에 덜컥 겁부터 났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는데, 하얀 옷을 입은 간호사가 나의 손에 알약을 쥐어주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집 근방의 약국에 들러 내 몸의 증상을 이야기했다. 하얀 가운의 약사는 스트레스와 영양부족일 수 있다고 하면서, 견공(犬公)의 고환과 유사한 이름이 붙은 종합영양제 한 병을 건네주었다. 이 약 때문인지, 천고마비 가을 시즌의 효과인지는 몰라도 서서히 식욕이 회복되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대학시험이 될 본고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던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시험이 끝나면 쓰러져 죽을 각오로 본고사에 대비하기로 했다. 하숙집을 나와 독서실로 짐을 옮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책 몇 권과 이부자리가 전부였다. 그곳에서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한 후, 피곤한 몸을 독서실 바닥에 눕혀 잠을 청하는 일과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계속하여 먹고 있던 결핵약도 시험일까지는 끊기로 했다. 독성이 강한 이들 약은 인한 무기력, 피로감, 집중력 저하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을 수반한다. 이런 부작용은 학습 능력을 저해하여 마지막 입시전략에 차질을 가져올 것 같았다. 한 달 정도의 복용 중단으로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주관적 판단도 이러한 행동을 실행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시험을 일주일 정도 앞둔 어느 밤, 나는 계속되는 기침에 잠이 깨었다. 이전보다 심해진 기침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천식환자처럼 깊은 기침이 서너 번 계속되더니, 목구멍으로부터 뜨뜻한 가래가 왈칵 넘어왔다. 입안에 고인 액체를 휴지에 뱉어 내니 아뿔싸, 그것은 단순한 가래가 아니라 시뻘건 피였다. 중증 폐결핵환자들에게 나타난다는 각혈 증상이 나에게도 온 것이다.
본고사가 코앞까지 다가온 시점에 비상이 걸렸다. 우선 다시 고개를 쳐든 결핵균의 기를 꺾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결핵약을 다시 복용하고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일주일만 버티면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치료와 학업을 병행해 나갔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몸을 바닥에 완전히 눕히면 허파 속의 혈압이 높아져 각혈이 심해졌다. 이 증상을 완화시켜야만 쪽잠이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이불꾸러미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운 채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늑막염으로 막판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고3의 상황이 재현되었다. 결핵성 늑막염 대신 폐결핵이라는 객체만 바꿔 2년 만에 방영된 시즌 2 드라마였다. 안갯속을 헤매는 나그네처럼 마지막 일주일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마침내 시험 날짜가 다가오고 이틀에 걸친 본고사가 시작되었다. 첫 시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 앞에 놓인 문제지를 펼쳤다. 내 깊숙한 폐부로부터 나오는 기침소리가 적막한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병균에 감염되어 누렇게 바랜 나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시험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세포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 톨의 에너지까지 쏟아부어 치른 시험이 드디어 끝났다. 오후 6시가 살짝 지났는데도 밖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나는 탈진한 몸을 겨우 일으켜 캠퍼스의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는 고인 물이 얼어 빙판이 형성되어 있었다. 얼음을 건너다 미끄러지면 시험에 미끄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회해 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이 나왔다.
시험은 끝났지만 고향으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전기 시험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후기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책을 펼쳤으나, 꼬인 실타래처럼 흐트러진 집중력으로 인해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 날이 되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원 출입문을 열었다. 현관에는 파랗게 인화된 청사진 여러 장이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학원에서 입수한 S대 합격자 명단이었다. 꿀단지에 붙어 있는 파리 떼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군중들을 비집고 떨리는 가슴으로 사회계열 합격자 명단을 찾았다.
'수험번호 1032번 OOO'
순간, 나는 다리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빙빙 도는 듯한 현기증으로 한참 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젠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3년간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피를 바치고 땀을 짜내어 얻어낸 합격이었다. 아편에 취한 아편쟁이처럼 몽롱한 상태에서 헤매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광화문 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광화문 전화국으로 가서 집으로 전보를 날렸다. 이번에는 전보용지에 다음과 같은 두 글자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