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의 생활은 여러 측면에서 서울과는 달랐다. 우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겨 보다 여유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교향과 가까워 가족들도 자주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심리적 안정감도 찾을 수 있는 건 덤이었다. 학생들과의 끈끈한 인간관계 역시 새로운 도시생활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또다시 도전의식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첫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 남짓 지난 10월 중순, 서울의 지도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저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싶습니다”
지도교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대학에 있으려면 박사학위는 있어야지”
부산에서의 첫 학기의 수업이 끝나갈 12월 중순 무렵, 내 인생의 마지막 관문인 박사과정 시험을 치르기 위해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만 했다.
토인비(A. Toynbee)에 의하면, 인류 문명은 도전(challenge)에 대해 인간이 성공적으로 응전(response)한 산물이다. 개인들의 역량이 모여 특정 문명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인간 개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 앞에 놓인 역경이나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보다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다.
다음 해 3월, 신학기 개강과 더불어 박사학위라는 또 다른 목표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중 사흘은 부산에서 강의하고, 이틀은 서울에서 수업받고, 나머지는 고향에서 간간이 농촌 일을 도우면서 학업을 이어가는 1인 3역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도 여의치 않아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4시간, 부산서 고향마을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리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세 곳을 뱅뱅 도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2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박사과정 수업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당시의 인생 역정에 있어서 최대의 난적이었던 서울까지의 장거리 통학도 막을 내렸다. 역마살이 낀 운명으로 몸은 힘들었지만, 주말과 방학 동안 고향에서 정신적, 육체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기에 버텨낼 수 있는 세월들이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자마자 건강 체크와 결혼 상담을 위해 한용철 교수님께 진료신청을 했다. 늦겨울의 한기가 볼을 때리던 2월 말, 나는 서울대 병원 호흡기내과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수님은 내 차트와 가슴사진을 번갈아 보시면서 말했다.
“현재로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네”
나는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런데 이런 몸으로 결혼을 해도 되겠습니까?”
“여자라면 모르지만, 남자는 큰 문제가 없을 걸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진료실을 나섰다.
흔히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라고 한다.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하고, 종국적으로는 결혼에 골인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결혼 프로세스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혼이란 때가 되면 해야 하는 일종의 요식행위였다. 이런 소극적인 결혼관(結婚觀)을 갖게 된 요인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그간의 나의 인생역정(人生歷程)에 있어서 결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요인으로는 당시만 해도 요즘의 연애결혼 대신, 결혼적령기에 주위의 지인들로부터 배우자를 소개받는 중매결혼이 대세였다는 점이다.
박사과정 수료 후 몇 달 지나, 소위 마담뚜라는 전문 중매쟁이로부터 중매가 들어왔다. 소개받은 상대 역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부산 출신의 여성이었다. 우리는 6개월 정도 만남을 이어가다 결국 결혼이라는 축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안정된 직장에 결혼이라는 이벤트까지 더해지자, 나의 생활은 심리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갔다. 결혼한 지 1년 정도 지나자, 이제 내 앞에 놓인 마지막 과제인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경험상 박사논문은 그 중압감이나 난도(難度)에 있어서 석사논문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박사논문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속성은 독창성이다. 독창성이 결여된 논문은 논문으로서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표절시비도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창성을 가진 논문을 작성하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은 것이다.
논문 작성을 위해 정열을 쏟고 있던 어느 여름날 저녁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세수를 하는데 왼쪽 귀 아래에 볼록한 멍울이 만져졌다. 논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기력이 쇠진해 있었던 터라 예감이 좋지 않았다. 곧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다시 한용철 교수님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임파선 결핵인 것 같은데 조직검사를 해봐야겠네 “
그 길로 나는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다. 진료에 시간이 걸릴 걸 예상하고 생필품 몇 가지를 챙겨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알파벳 Y자를 맞붙여 놓은 병원 10층의 병실에서는 창덕궁 비원(祕苑)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들은 저 정원을 거닐며 무슨 상념에 젖었을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들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번뇌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리라.
달맞이꽃
다음날부터 기관지 내시경, 임파선 조직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가 시행되었다. 지금까지 무수한 검사를 해 봤지만 기관지내시경만큼 힘든 검사도 없었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내시경 호스가 기관지로 들어가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심한 기침으로 내장이 토해지는 듯한 괴로움도 맛보아야 했다. 내 입원소식에 놀란 집사람도 상경하여 24시간 간병과 온갖 심부름을 도맡았다. 내성검사를 받기 위해 임파선 검체를 대한결핵협회에 가지고 가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보름 동안의 검사와 진단이 끝나고 다시 주치의를 만나기 위해 진료실을 방문했다. 항결핵제가 듣지 않아 복용할 약이 없을 거라는 내 고민을 읽은 듯, 그는 웃음 띤 얼굴로 나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약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교수님은 진료차트에 몇 가지를 기입하더니, 튜버액틴 주사제와 타리비드라는 새로운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아무래도 내 몸속의 결핵균이 기존의 약제에 대해서는 내성이 생긴 것 같았다. 다시 병원체와의 일전(一戰)을 각오하면서, 내가 만든 속세의 새로운 인연과 함께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