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팔러 가던 날

by 여송

가을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로부터, 수확의 계절, 우수(憂愁)의 계절 등이 그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공기는 여름철 무더위로 잃어버린 입맛을 돌아오게 하니, 이 계절이 되면 말뿐만 아니라 사람도 살찌게 마련이다. 가을이 깊어져 낙엽이 길바닥에 나뒹굴 때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가 생각나고,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것이다. 비록 그 길이 도시의 삭막한 아스팔트 길이라 할지라도...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다가오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텃밭의 땅콩을 캐는 일이다. 짧게는 금년 봄부터, 길게는 작년 가을부터 이 작물에 쏟은 정성과 흘린 땀방울이 드디어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지난가을 이맘때, 수확한 땅콩 중 제일 크고 튼실한 땅콩 알만 골라 종자용으로 냉장고에 보관하여 왔다. 금년 4월 초, 종이봉지에 고이 싼 땅콩을 꺼내어 연결 포트(계란 판 모양의 플라스틱 용기)에 담은 다음 그 위에 흙을 덮고 물을 뿌린 후, 햇살 따스한 창틀에 내어 놓음으로써 본격적인 땅콩 농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땅콩은 그 맛이 고소하고 영양분이 풍부해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좋아한다. 특히 꿩이나 비둘기가 이 작물을 좋아해 노지에 땅콩 종자를 그대로 심으면 이들이 대부분 파먹어 버린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연결 포트에서 싹을 틔운 후 그 모종을 밭에 이식하는 것이다. 요즈음엔 농부들이 땅콩뿐만 아니라 배추, 상추, 토마토, 오이 등의 작물도 씨를 뿌리는 대신 모종을 사서 심는다. 이들 모종은 종묘상은 물론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땅콩은 병충해에 강하고 생존 능력이 뛰어나 다른 작물에 비해 농사짓기가 편하다. 싹이 튼 땅콩을 밭에 이식하면 대부분 잘 살아난다. 이는 땅콩이 발아하면서 두 쪽으로 쪼개진 땅콩 알이 떡잎이 되어 그 속에 든 풍부한 영양분을 어린 새싹에게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인간을 비롯한 포유동물들이 갓난아이에게 어미젖을 먹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식된 모종이 착근을 하고 난 후에는 자주 돌보지 않아도 잘 자란다. 이 작물은 오히려 수확 후의 일이 더 번거롭다. 뿌리에 달린 열매를 하나씩 손으로 따야 하고, 그것을 장기간 보관하기 위해서는 건조시켜야 한다. 껍질째 말린 땅콩 열매는 또다시 일일이 깐 후 속의 알맹이를 분리해야 볶음땅콩이나 땅콩가루의 원료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란 매 한 가지여서 한 측면이 수월하면 다른 측면에는 어려운 점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한낮의 열기를 피해 아침부터 작업이 시작되었다. 삼지창을 ‘ㄱ’ 자처럼 구부려 만든 쇠스랑이 땅콩 캐는 작업에 쓰이는 농기구다. 땅콩 잎사귀 위에는 열심히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달팽이가 보인다. 크기가 겨우 쌀알 만한 소형 달팽이다. 이들이 식사를 하고 난 잎은 하얗게 말라버린다. 쇠스랑의 뾰족한 날이 땅콩 밑동을 파고드는 순간, 이들의 아침 밥상도 날아가 버렸다.


보드라운 모래흙 속에 묻혀 있던, 하얀 땅콩 열매가 세상 밖으로 그 자태를 드러낸다. 땀의 결실을 맛보는 기쁨도 잠시, 대부분의 열매가 예년에 비해 크기가 작아 다소 실망스럽다. 이 식물이 한참 성장할 시기인 초여름에 날씨가 가물어서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이다. 햇빛이 너무 강렬하면 아무리 물을 주어도 식물이 성장하지 못한다. 과일도 대부분 낙과(落果)되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조차도 크기가 잘다. 올해는 자잘한 땅콩을 수확하라는 하늘의 준엄한 명령이다. 농부는 농사에 종사하기 이전에 하늘에 순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열매의 크기야 어찌 되었든, 파낸 땅콩 포기를 마당에 널어놓으니 마음이 넉넉하다. 이게 바로 수확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잠시 숨을 돌린 후 뿌리로부터 땅콩 열매를 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그리 힘들지는 않으나 많은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땅콩 뿌리에 달린 열매 사이로 옛날 아이들의 피부에 난 부스럼같이 징그럽게 생긴 혹들이 보인다. 이른바 뿌리혹박테리아다. 이 미생물은 땅콩 뿌리에 기생하면서 영양분을 얻고 그 대가로 질소를 공급한다. 식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며, 그중 특히 질소, 인, 칼륨이 농작물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요소를 비료의 3요소라 부른다. 이 중 예로부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질소였다. 인산비료와 칼륨비료는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지만, 질소비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 질소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대기의 약 78%를 차지할 정도로 그 양이 풍부하다. 이 많은 질소를 뒤집어쓰고 살면서, 그것이 부족해 식물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박테리아다. 따라서 땅콩 등 콩과 식물에는 질소비료를 할 필요가 없다. 질소비료도 이 박테리아에서 힌트를 얻어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하여 생산한다.



뿌리혹박테리아는 또한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fix)시켜 단백질을 합성한다. 이 박테리아는 주로 콩과 식물에 기생하여 탄수화물을 흡수하여 생존하는 한편, 그들에게 합성된 단백질을 제공하는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콩을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단백질이 풍부한 쇠고기 등 육류는 지방이나 콜레스테롤 등 인간에게 해로운 물질도 포함하고 있지만, 콩에는 그런 성분이 없으니 이들보다 더 양질의 단백질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셈이다. 내가 텃밭에 해마다 땅콩과 콩을 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생살이가 그러하듯이, 콩이나 땅콩이 좋은 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단백질은 양질이다 보니 쉽게 변질되는 단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땅콩의 경우 수확한 직후의 풋 땅콩을 삶아 섭취하는 것이 식품의 영양적, 안전성 측면에서 가장 바람직하다. 이들을 장기간 보존해야 할 경우에는 바짝 건조시킨 후에 냉동실 등에 보관하여야 부패나 변질을 막을 수 있다. 재주 있은 사람은 병치레가 많고, 미인은 목숨이 짧다(才子多病 美人薄命)는 속담은 이 땅콩에도 적용될 수 있다.

기후나 자연현상이 그러하듯이 토양도 식물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땅콩은 모래가 많이 섞인 이른바 사질토(沙質土)에서 잘 자란다. 이런 땅이라야 배수가 잘되어 식물이 제대로 자라고, 흙이 부드러워 토양 속의 땅콩 열매가 변형되지 않는다. 뿌리가 길고 곧게 뻗어나가는 우엉이나 마 등도 이런 토질에서만 재배할 수 있다.


고향마을 주위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상류의 모래와 퇴적물들을 하류로 실어 날라 비옥한 농지를 만들어 놓았다. 조상들은 예로부터 이곳에서 땅콩, 우엉, 토란, 마 등의 특용작물을 재배하여 왔다. 우리 집도 이런 자연환경을 가진 밭을 가지고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작물들을 길러 적잖은 수입을 올리곤 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가을 어느 날, 아버지는 캐낸 땅콩을 도회지의 청과시장에 가서 팔아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확된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은 부모님의 몫이었지만 그날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청과시장은 시외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 가야만 하는 다소 먼 거리에 있었다. 모처럼의 시내 나들이라 옷차림이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외출복이라고는 교복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나는 교복을 단정히 입고, 머리에는 학교 배지가 붙은 모자를 쓴 채 묵직한 땅콩자루를 메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가 도착하자, 교복차림으로 땅콩 팔러 가는 것이 다소 쑥스럽고 창피하여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맨 뒷자리로 가서 않았다. 두 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어떻게 달려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힘들게 청과시장에 도착했으나 두 시간 정도 기다린 후에야 경매가 시작되었다. 사무실에 들러 돈을 찾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경매로 넘긴 땅콩 대금에서 수수료, 차비 등을 공제한 후 내 손에 쥐어진 돈은 몇 푼 되지 않아, 그날은 이래저래 하루 종일 쫄쫄 굶은 채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어렸을 때부터 땅콩을 재배하여 왔던 경험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 이 작물을 경작하는 데 있어서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어찌 땅콩 농사에만 해당되겠는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은 사람이 이것들을 기초로 훗날 보다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저녁에는 지금 막 수확한 땅콩을 삶아 그 고소한 맛을 즐길 참이다. 땅콩을 삶을 때에는 오랫동안 끓인 후 10여분 정도 뜸을 들여야만 서걱거리는 식감을 없앨 수 있다. 탄수화물이 주성분인 쌀이나 콩 등의 곡류, 고구마나 감자 등의 덩이줄기 등도 모두 일정 시간 동안 뜸을 들여야 그 맛이 부드러워진다. 전기밥솥에 뜸 들이는 프로그램을 넣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삶은 땅콩에 뜸을 들인 후에는 냄비 뚜껑을 덮은 채로 냄비를 기울여 남은 물기를 따라버린다. 그 후 다시 센 불로 2~3분 동안 가열한 후 냄비 뚜껑을 열고 몇 번 까불어 주면 물기가 제거되어 삶은 땅콩을 까먹을 때 물이 뚝뚝 떨어지는 불편함이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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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나는 힘들게 수확한 이 땅콩에서 뿌리혹박테리아가 만들어 낸 단백질을 맛볼 것이다. 아울러 수십 년 전, 땅콩에 얽힌 추억도 함께 되새기며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즐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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