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위에 맺은 결실

by 여송

계속되는 도시에서의 주말 행사로 3주 만에 찾은 시골 고향집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집 앞의 배수로는 잦은 비에 흘러내린 토사로 막혀버렸고, 갈 길 잃은 빗물은 집 안으로 흘러들어 온 마당이 진흙밭으로 변했다. 한여름 폭염에 비실비실하던 호박은 때늦은 가을비에 맹렬히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들 세력 중의 한 무리는 겁 없이 정원수 위로 기어올랐고, 다른 세력은 발산개세(拔山蓋世)의 기세로 온 마당을 뒤덮고 있다. 생태계 교란종인 가시박은 주인 없는 틈을 타 쥐똥나무 위로 기어올라 줄기 끝에 하얀 꽃을 피웠다. 이 꽃이 진 후 맺힌 열매들이 내년에 다시 자라나서 농작물과 토종 식물들을 괴롭힐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텃밭의 농작물은 다행히도 별 탈 없이 잘 자라고 있다. 8월 말에 심은 김장용 배추와 무는 고온다습한 기후 덕에 무난히 뿌리를 내렸다. 그렇다고 안심하기는 이르다. 부드럽고 연한 새싹을 좋아하는 벌레나 병균들이 어린 모종에 달려드는 시기가 이때인 것이다. 프랑스로 떠나는 레어티즈가 누이동생 오필리어에게 햄릿을 조심하라며 충고했던 '봄의 새싹들이 봉오리도 열기도 전에 자벌레가 그것들을 갉아먹고, 청춘의 아침 이슬 속에는 전염성 마름병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은 동서고금, 인간과 자연을 막론하고 적용되는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병충해를 막기 위해 파종 직후 김장 채소밭에 모기장을 쳐 두었다. 이 모기장이 효력을 발휘한 탓인지 어린 작물들은 병충해를 입지 않았다. 무, 배추를 경작할 때 가장 골치 아픈 일과 중의 하나가 병충해 방제인데, 이런 상황이라면 앞으로 농약살포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다소 낙관적인 생각을 해 본다. 발상의 전환이 때로는 예상치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이디어는 재배면적이 좁은 작물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마는...



텃밭의 주력 작물인 콩과 들깨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지난여름, 폭염으로 인해 발육상태가 불량한 콩은 예상했던 대로 작황이 좋지 않다. 포기당 맺은 열매 수가 예년만 못한 것 같다. 반면 가뭄과 더위에 강한 들깨는 예년 못지않은 수확이 기대된다. 이 작물은 내 어깨 높이까지 자란 키에 가지도 많이 뻗었고 열매도 충실히 맺었다. 작년에 수확한 콩이 많이 남아 있어 올해는 콩 재배면적을 줄이고, 거기에다가 들깨를 심는 바람에 폭염의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농작물은 하늘이 주는 만큼 거두어들인다는 옛 조상들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가뭄과 폭염을 뚫고 무난하게 자라난 들깨이지만 지금까지의 성장과정에 우여곡절도 있었다. 들깨는 보통 초여름에 씨를 뿌려 싹을 틔운 다 모종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 노지에 옮겨 심는다. 지난여름, 들깨 파종을 한 후 주말에 일이 겹쳐 2주 만에 시골집에 왔더니 돋아난 싹이 모두 말라죽었다. 다시 씨를 뿌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경과하였다. 인생살이와 마찬가지로 농사에도 적절한 시기가 있고, 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노쇠한 몸으로 농사일에 매달리고 있는 고향 할머니들에게,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농사짓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푸념을 염치없이 늘어놓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시골집을 나서려는데 대문 앞에 커다란 비닐봉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봉지에는 튼실하게 자란 들깨 모종이 가득 담겨 있었다. 들깨 파종 시기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내 모습을 본 마을 할머니들이 십시일반으로 들깨 모종을 갹출하여 집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할머니들의 따뜻한 마음에 보답하고자 당장 폭염 속에서 모종을 심고 물을 듬뿍 주면서 이들이 잘 자라나기를 기원하였다.


지금 눈앞에 풍성하게 맺은 이 들깨 열매는 고향 사람들의 인정으로 맺은 결실인 것이다. 그들의 성원에 보답하고자 들깨 주변의 잡초를 뽑고 간간이 보이는 벌레들을 제거하였다.


호박넝쿨 정리와 텃밭의 김매기 작업을 끝내고 나서 집 주변의 풀베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무겁고 진동이 심한 예초기를 짊어지고 행해야 하는 이 작업은 위험을 수반하는 고된 작업이다. 우리 집 주변의 작업이 끝났는데도 예초기 연료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할머니 홀로 사는 독신자 가구가 대부분인 농촌에서,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농사일은 예초기나 경운기 등 농기계 작동과 병충해 방제이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복잡한 농기계 작동방법, 병충해 방제에 관한 지식과 상당한 신체적 근력이 요구된다. 나이가 들어 근력이나 시력이 떨어진 할머니들에게 이러한 작업은 무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농촌 사정을 잘 알기에 제초작업과 병충해 방제를 위한 농약살포 시에는 항상 여분의 연료와 농약을 채우는 것이다.


예초기의 엔진을 끄지 않은 상태에서 이웃집 할머니의 텃밭으로 가서 추가적인 제초작업이 시작되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예초기의 칼날에 무성하게 자란 풀이 도미노 넘어지듯 쓰러진다. 풀숲 속에 숨어 있던 여치와 나방들이 놀라 도망치기 바쁘다. 30여 분만에 할머니 집 주변의 풀베기 작업도 무사히 끝났다.


텃밭 경계에 서 있는 할머니의 감나무에는 감이 빨갛게 익었다. 가뭄과 폭염으로 과일의 크기는 작지만 당도만은 낮지 않을 것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이웃집 할머니는 우리 집 쪽에 열린 감은 수확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할머니에게 버거운 농사일을 가끔 도와주는 것이 고맙다고 나 먹으라고 일부러 남겨둔 것이다.



예초기를 내려놓고 감나무의 감을 따기 시작하였다. 벌레가 먹어 홍시가 된 감은 그 자리에서 바로 입 속으로 들어간다. 혀 끝에 스미는 달콤한 맛이 오뉴월의 폭염보다도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나는 지금 감이라는 단순한 과일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따스한 정(情) 맛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긴 여정(旅程)이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목적지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여행을 가거나 남에게 선행을 베풀겠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인생은 하나의 여정이며, 목적지가 아니다(Life is a Journey, Not a Destination)'라고 한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alph W. Emerson)의 말은 우리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우리에겐 불확실한 미래의 부나 명예보다는 당장 오늘 하루 얼마나 감동과 희열에 찬 삶을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갑에 돈이 얼마가 있는가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가슴이 얼마만큼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했느냐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감동이나 희열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난여름의 폭염을 극복하고, 이웃 사람들의 성원으로 풍요롭게 결실을 맺은 텃밭의 작물들은 오늘도 내 가슴을 감동과 기쁨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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