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로 과거와 매듭짓다
곤마리 정리법을 배우던 중,
어느 날의 일기장을
브런치에 기록해 본다.
정리는 인생의 새 출발이다.
정리를 결심한 그때가
과거를 매듭짓고
미래로 첫걸음을 내딛는
최고의 타이밍이다.
이전의 정리와 달랐던 점은 과거와 매듭을 지었다는 것이다.
20대 때의 뜨거웠던 나의 꿈, 웨딩파티 기획자
여전히 눈시울이 불거지는 거 보면 너무 아쉬운 마음인 걸까? 그때의 내가 불쌍한 걸까. 다독여주지 못했던 탓일까? 지금 비가 와서 그런 걸까.
여전히 마지막 퇴사하는 날이 너무나 선명해서일까? 다들 퇴근한 밤 11시경쯤 조용한 창가자리에서 엉엉 울던 내가, 컴컴한 건물에 불 하나 켜진 사무실, 그리고 저 창가에서 울고 있는 내 자신이 자꾸 3인칭 시점에서 보인다.
그때의 나의 열정은 정말 뜨거웠다. 평창동 2층 저택에서 일본인 선생님께 하우스웨딩에 대해서 배웠다. 전통, 궁중혼례를 알고 싶어 상궁역할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본으로 날아가, 웨딩홀에 가서 일을 했다. 마침내 한국에 와서 회사에 들어가 불태웠다.
신랑신부가 2시간이 넘는 결혼식이 끝날 때 마지막 마이크를 들고 감사인사를 하는 중에 나의 이름을 불러주던 순간들을 평생 잊지 못한다.
몸을 담았던 회사를 나오는 순간, 내 웨딩의 꿈은 사라지고 절망감에 빠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한 직장에 오래 계시는 아빠는 “너의 20대는 실패야.”라는 말로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60대까지 웨딩일로 계획했던 비전보드.
이 꿈을 잃고 다시는 비전보드를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다 만나지 않았던가.
(2023년 비전보드를 만들자, 곤도 마리에를 만났다.)
결국 웨딩을 그만둔 건, 내가 선택한 일이다.
그렇게 나는 웨딩의 소품들을 한국에 간직한 채, 일본 료칸으로 일을 하러 갔다.
그때는 왜 이 물건들을 버리지 못했을까?
여전히 나의 아픈 손가락이기도 한 물건들. 서랍 한쪽 구석에 깊이 묻어뒀던 것들이다.
이제는 설레지 않는다. 미련은 있다. 하지만 갖고 있으면 마음을 짓누르는 기분이 드는 것을 왜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걸까.
사실은 언젠가 다시 웨딩일을 시작하고 싶었나 보다.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버리면 소중한 추억도 함께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정말 소중한 추억은 물건을 버려도 절대 잊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다. 그 과거의 경험을 거쳐 존재하는 지금의 우리 자신을 우선시 하자.
공간은 과거의 자신이 아니라 미래의 자신을 위해 써야 한다.
곤도 마리에 (곤마리)
이제는 놓아줘야지. 웨딩업계에 일을 하는 포토그래퍼 언니에게 필요한지 물어보았다. 내게는 가치 있어 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예쁜 쓰레기일지 몰라 항상 물건을 전할 때 조심스럽다.
흔쾌히 받는다는 말에 쓰레기통으로 안 가게 되어 안심했다. 휴. 다행이다. 이제 세상밖으로 나가서 많이 쓰이길 바래.
곤도 마리에 컨설턴트 수업을 들으면서 사람들과 많은 의견들을 나누는데, 대화 나눈 사람 100%가 곤마리 정리법으로 인생이 변한 사람들이었다.
한 수강생은 곤마리 정리 후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고 한다.
정리를 정말 못한다는, 나와 동갑이고 아이가 둘인 동기는 정리의 마법을 직접 체감하고 컨설턴트라는 직업은 뭘까?라는 동기로 배우게 됐다고 한다.
어머니뻘의 동기분은 그동안 손님이 오면 써야지.하고 아껴뒀던 커트러리 그릇들을 꺼내서 쓰게 되니, 전보다 훨씬 풍요로음 느끼며 생활하게 되었다고 했다.
등등…
고객으로서 곤마리 정리 컨설팅을 받은 후에 컨설턴트에 호기심을 갖게 돼, 배우게 된 사례들이 많았다.
그들은 정리를 통해 인생에 많은 설렘이 찾아왔다고 입모아 말한다.
하나같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들이 증인이며, 나도 포함이다.
과거와 잘 매듭짓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정리는 빛나는 마법과도 같다.
나의 뜨거웠던 20대야, 안녕.
이 글을 퇴고하면서도 눈물이 또르르.
추억은 가장 비우기 어렵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에 정리한다.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