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괴한의 습격이다. 영진은 유리를 홀로 차에 남겨둔 것을 후회했다. 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영진은 제정신이 아닐 것 같은 불안감에 얼굴까지 일그러졌다. 주차장 입구까지 뛰어 왔을 때 한 명의 괴한이 유리의 목덜미를 잡아 차에 태우려 하는 모습을 봤다. 차에 대기해있던 운전석의 또 다른 한 명도 같이 온 모양이다. 영진은 망설임 없이 다가가 유리를 안고 있던 놈의 머리채를 뒤로 잡아당긴 채 얼굴을 강타했다. 그리고는 유리의 손목을 잡고 도망한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현실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분명 유리의 부모님의 짓일 거다.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고 돈을 주고 사람을 산 모양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왜 그래야만 하는지 영진은 알 수 없다. 아마 유리도 모를 것이다. 그동안 믿고 살았던 세월만큼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낯설다.
작은 골목에 몸은 숨긴 영진과 유리는 가뿐 숨을 내쉬며 벽에 붙었다. 다행히 따라붙은 자들은 두 명. 유리 하나를 잡기 위해 여러 명이 움직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유리 옆에 붙은 영진은 키만 185센티다. 아무리 몸을 특별히 단련하지 않았더라도 키와 등치에서 발산되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을 겨우 따돌린 영진과 유리는 곧바로 차로 돌아갈 수는 없을 터, 근처 옷가게로 들어가 몸을 단장한다. 바로 옆에 붙은 미용실에도 들른다. 유리는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 어깨까지 자른 머리카락 길이는 유리의 분위기를 한 껏 바꾸어 놓았다. 유리가 머리를 손질받는 동안 영진은 내내 유리벽 너머로 괴한들이 있을까 두리번거린다.
"어때?"
유리는 눈치 없이 영진을 향해 웃는다.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 상관없다는 듯한 미소에 영진은 또 한 번 심장이 내려앉는다. 이런 걸 심쿵이라고 하던가. 유리의 눈망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그저 온전히 유리의 것이 된 것만 같은 감정에만 충실할 뿐이다.
"어떻긴 뭐가!"
쑥스러움이 표 나게 드러났다. 영진은 반응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란 후회를 한다. 그동안 본 적 없던 유리의 청바지 핏, 그리고 그 위로 얇은 티를 코디해 입으니 유리의 몸매가 한 껏 살아난다. 앞서 걷는 유리의 뒷모습을 영진은 하염없이 바라본다. 따라 걷는 이 길이 좋을 만큼. 영진은 생각보다 더 깊이 유리를 마음에 담아두게 되었다.
"아무래도 차 번호판을 바꿔야겠어. 아빠 친구분이 몇 개 갖고 있을 거야."
어둠이 내려앉은 어느 지방의 소도시. 그곳에 연락이 닿은 화물기사분을 만났다. 영진은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뵈었던 그분을 기억하고 있다. 알 수 없는 안쓰러움으로 자신을 바라봤던 그는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있는 것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이럴 때 그가 생각난 건 왜 일까.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을 묻지 않고 도와주실 것 같은 믿음이 생긴 건 아마 그 장례식 때 받았던 그의 표정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운행 중 한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는다고 했다. 마침 가까운 거리라 영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서로 가기 전, 유리의 부모님이 붙인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을 준비가 되어 보였다. 무엇을 쫓아 가는지 알 수 없는 여정이지만 유리와 영진은 진실을 알고 싶은 게 다일 것이다. 더 이상의 거짓 보호는 그들에게 불필요했다.
그가 머문다던 작은 마을 포장마차 가게를 찾았다. 이미 얼큰하게 취해계신 듯한 그는 곧 영진을 알아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환대했다.
"어서 와, 영진 군. 아이고~ 예쁜 일행이 있었군."
밤 11시. 어느 시골 동네.
"그깟 번호판 몇 개도 줄 수 있지, 암~"
아저씨는 이들의 상황 설명은 듣지도 않은 채 무한 호의를 베풀 것처럼 보인다. 상에 차려진 조촐한 안주와 이미 비어버린 소주 3병, 그는 영진을 기다리며 이것들을 벗 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니 아버지 살아 계실 적, 내가 빛을 진 게 있어. 너한테라도 갚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그와 아버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진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진은 지금 유리와 함께다. 그녀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술잔을 몇 번 연거푸 들이키더니 영진에게 뜬금없는 사과를 한다.
"영진아, 이 아저씨가 미안하다."
"아뇨, 저희가 감사하죠. 그런데 아저씨, 이제 술은 그만 드셔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취하셨어요."
"그래그래.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아이쿠~"
일어서는 그를 부축한 건 유리였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쓰러질 것만 같은 그의 한 팔을 움켜잡았다.
"아이고, 아가씨.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내가 영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그래."
비슷한 또래의 자녀가 있으신 걸까. 유리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트럭까지 그를 배웅한다. 트럭에 숨겨두었던 번호판을 내어주겠다며 비틀거리며 걷는 그의 뒷모습을 영진과 유리는 불안하게 지켜보며 걷는다. 불법인 것을 알지만 그걸 자행하게 된 영진이 안쓰러우신 걸까. 유리는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이 자리가 불편하다.
시골 논두렁 길가에 세워진 아저씨의 덤프트럭. 가로등도 없는 컴컴한 시골길을 따라 아저씨가 앞장서서 걷고, 그 뒤로 젊은 남녀가 따라붙는다. 암흑 속에서 거래가 이뤄질 것이다. 사방에서 들리는 작은 풀벌레 소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존재를 알린다. 곤충들에게는 지금의 시간이 불꽃같을 것이다. 영진은 이 소리와 공기의 감촉을 느끼며 유리의 존재를 본다. 옆에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유리의 존재는 암흑 속이라 할지라도 숨겨질 수 없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생명에게서만 있는 마법 같은 기운이다.
아저씨는 두 개의 번호판을 내어주신다. 불법으로 몇 개를 갖고 계시지만 사실 이런 건 기사들에게 흔치 않은 일임을 영진이 모를 리 없다. 아저씨가 세상을 바르고 올곧게 사신 분이 아니라는 것도. 어쩌면 그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연이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묻지 않는다. 그가 영진에게 지금의 상황을 묻지 않은 것처럼.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설명되지 않는, 어른들의 잔소리가 될만한 많은 일들이 가득한 이런 상황은 사실 어떠한 훈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바르게 살라는 말로는 감당되지 않을뿐더러, 자행되는 것이 아니라 극한으로 몰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는 영진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더 말한다.
"영진아, 이 아저씨가 미안하다."
번호판을 전해주는 그는 영진의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기도문을 외우듯 속삭이신다. 취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영진은 왠지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여 마음이 안 좋았다. 아저씨는 빠르게 몸을 돌려 트럭에 오르신다. 배웅일랑 거절하겠다는 손짓을 하시고는 검은 공기 사이로, 세워진 트럭 안으로 사라지셨다. 영진은 손에 전달된 번호판 외에 작은 봉투를 본다. 그 봉투에는 8천만 원이 담겨 있었지만 영진은 확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