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유리 11화

살아난 유리 조각 #11

by Cruel Ella

영진은 아저씨에게서 받은 번호판을 자신의 차에 장착하는 중이다. 어두운 길목에서 작은 핸드폰 손전등에 기대어하는 작업이라 구태여 번호를 확인하지 않는다. 어떤 번호이든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영진의 차가 노출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로 올라가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서를 찾아가는 것이 급선무이다. 아저씨에게서 받은 돈 봉투는 노트북 가방에 넣어둔다. 언젠가 저 돈에 관해서 아저씨에게 들을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 아저씨 말이야..."


유리가 먼저 입을 연다.


"너한테 뭐가 그리 미안하신 걸까?"


영진은 아무 말이 없다.


"궁금하지 않아?"


영진은 궁금하지 않다. 이미 묻지 않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뭔가 있을 거란 생각은 아버지 장례식 때 알았다. 굳이 알려고 했었다면 그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함을 버리지 않고 간직했던 자신의 행동에도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이냐, 고영진.


"다 됐다. 출발하자."


영진은 벌떡 일어서더니 몸에 묻은 먼지를 턴다. 그리고는 서둘러 차에 타 시동을 건다. 서울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유리도 급하게 조수석에 자리한다. 그리고는 영진의 눈치를 살핀다. 이미 아까부터 피곤해 있었지만 유리는 영진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시간은 새벽 00시 40분. 기다리다 못한 유리가 영진에게 제안을 한다.


"근처에서 자고 가자."


유리의 말을 못 들은 척, 영진은 서울을 향해 계속 운전 중이다. 영진은 그동안의 분위기와는 다른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다. 유리가 영진을 보고 안도했던 그 느낌과는 사뭇 다른 거친 남자가 앉아있는 듯하다. 유리는 달라진 공기를 느끼지만 최대한 모른 척 애쓰며 영진을 향해 상체를 돌려 눈을 맞추려 한다. 이 모든 일은 자신 때문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진만 고생을 하는 듯하다.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서야 현실이 어떤지 느껴지고, 한숨 돌리고 보니 유리는 영진에게 모든 걸 기대고 있었다. 그런 영진에게 미안해진 걸까, 신세를 지는 일이 어려워진 걸까.


"응? 잠은 자야지~ 어제부터 한 숨도 못 자고 계속 운전만 하잖아."


영진은 뭐 때문에 자신이 없는 걸까. 유리의 말이 위험하게 들리는 이유는 영진만 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으려 핸들을 더욱 꽉 쥐어본다.


"영진 씨~"


영진은 급정거로 갓길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 거친 호흡으로 유리를 바라본다.


"너, 감당할 수 있어?"


"... 뭘?"


"지금 이 상황, 그리고 나!"


유리의 눈빛이 흔들린다. 영진은 겨우 참고 있던 말을 꺼내놓고,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




유리는 한 모텔방에 와 있다. 침대에 걸터앉은 유리는 아무 말이 없다. 조금 전, 영진이 갑자기 화를 냈을 때 유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안일했다. 자신이 영진에게 기대어 있었던 시간만큼 영진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집을 뛰쳐나와 영진을 만났을 때 누구보다 반가웠다. 그리고 안심이 됐다. 내 하늘이 무너졌다고 주저앉아 살았던 힘든 지난 1년이 영진을 통해 다시 새파란 하늘을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동행해주고, 괴한으로부터 구해준 영진이 고마웠다. 단순히 고마움으로만 끝낼 감정이 아니었는데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적당한 핑계가 될 수 있겠다.


옆 방엔 영진이 있다.


영진은 거칠게 운전을 하더니 한 모텔에 들어가 키를 받아 들고 유리에게로 왔다.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은 층에서 내렸지만, 영진은 유리에게 방 키 하나를 내어주고 돌아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리는 가만가만 생각한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며 지금의 감정을 읊어본다.


"내가 힘들게 한 건가? 어쩌다 그를 이렇게 몰아세우게 된 걸까?"


옆방에 자리한 영진은 급하게 노트북을 꺼내어 큐베이스를 켠다. 큐베이스는 작곡 프로그램이다. 영진이 할머니 집에서 나올 때 노트북을 챙겨 나온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노트북 가방 안에는 아저씨께 전해받은 돈봉투가 함께 들어있다. 점점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영진은 머리가 아프지만 지금 당장 작업을 하지 않으면 잊힐 여러 가지 감정을 꺼내어 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프로그램에 진열한다. 미세한 박자의 음표들이 모이면 하나의 작품이 될 것이다. 굳이 머리 쥐어짜 꺼내지 않더라도 리듬과 선율이 나올 때가 있다. 그건 무척 운이 좋은 순간일 뿐이다. 창작의 고통은 느껴본 자만이 안다. 이렇게 영진의 슬럼프 이유 중 하나가 밝혀진다.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었다. 경험하지 못했으니 나올 수 없었던 것들. 영진은 지금 복잡해지고 미묘한 감정선들을 나열하고 있다. 정리가 될 것 같지만 결코 정리될 수 없는, 처음 경험하는 사랑의 감정을 마주하고 있는 중이다. 달콤하고 아름답기만 할 거라고 예상했던 사랑은 참 여러 가지 색을 지녔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유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나오지 못할 것들로만 가득 차 버렸다. 프로그램을 돌리는 마우스 질이 현란해진다. 집중하면 한 번에 4~5시간은 금방이다.


"젠장!"


손에 쥐던 마우스를 벽에 던져버린다. 그 소리에 옆방에 있던 유리가 깜짝 놀란다. 영진은 지금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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