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유리 09화

살아난 유리 조각 #9

by Cruel Ella

아침 7시.


구불거리는 해안가를 따라 달린다. 도로 옆에서 전해오는 파도 소리가 무척이나 경쾌하다. 밤새 내리던 비는 그쳤고 새파란 바다색을 닮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자기의 색이었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모습을 찬란하게 빛낸다. 유리는 그런 하늘을 보며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부풀어 있다. 달라진 현실은 없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은 그대로인데도 집을 벗어나 있다는 것만으로 자유를 느낀다.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며 느꼈던 자유함과 비슷하다. 유리는 이제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울지 않는다. 그리고 약도 먹지 않는다.


"살면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해본 불효였어. 그이랑 결혼하겠다고 우긴 게."


유리가 처음으로 자신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낸다. 궁금했었으나 굳이 묻지 못했던 이야기가 시작되자 영진은 당황했지만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진 않는다. 잡고 있던 운전대를 더욱 세게 쥐어 볼 뿐이었다.


"어느 부모든 반겨할 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 바이크 선수라는 것이 그래. 아직 우리나라에서 인정받을 만한 직업군이 아니니까. 기껏 배달부로 여겨지는 게 다거든. 그런 그가 고아라는 사실도 반갑진 않으셨을 거야. 그땐 우리 부모님이 유별나다 생각은 못했어. 어느 부모나 반대할 수 있는 남자라고 은연중에 여겼던 거지. 반대라는 사실만으로 우린 더 끈끈 해진 걸지도 몰라. 첫 반항을 시작한 것에 대한 끝맺음도 필요하다고 생각돼서 그런지, 고집도 생겼어. 그래서 남편과의 순간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지. 서로를 사랑하기에 열정적이었고, 가난했어도 행복하자고 마음먹으니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고. 부모님 보란 듯이 알콩달콩 소꿉놀이처럼 재밌게 사는 것이 나에게는 부모님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거든."


굽은 도로를 지날 때마다 가냘픈 유리의 상체가 기운다. 영진은 그런 유리의 모습을 보며 조심히 커브를 돌아보지만 무엇하나 지탱되어있지 않은 유리의 몸뚱이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나풀거린다. 휘적휘적. 영혼만 남겨진 몸뚱이에 눈물이 고여 허공에 한을 풀어내듯 유리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어쩌면 과거의 기억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자신을 치유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뺑소니 사고라는 것이 남편을 잃은 것이 한처럼 가슴에 맺혔어. 사고의 원인과 결과가 없이 그냥 남편만 세상에서 없어진 거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이 한 순간에 나의 모든 게 변했어. 내 하늘이 무너지고, 어렵게 쌓아놓았던 니 인생을 부셔놨어. 다시 부모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도 이해될 수 없는 사고였기 때문이야."


사고의 주체가 화물트럭이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영진을 배려하고 있다는 생각에 영진과 조금은 가까워졌을 기대를 품게 되었다. 상처 주지 않으려고 작은 것에서부터 신경을 쓰는 유리 자신 모습에 속으로 웃음이 난다. 예전엔 그렇게 살았었는데 남편이 죽은 후의 1년은 유리답지 않은 삶이었다.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사고 처리를 했어야 했어. 결혼한 어른답게 내 남편의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내가 처리했어야 했어. 난 충분히 어른으로써 잘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었나 봐. 그때도 부모님 보호 안에서 그저 슬퍼하기만 했던 어린 딸이었던 거지. 지난 1년 동안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이외에 내 기억에 남은 게 없어. 장례도, 사고 처리도, 관련 서류 싸인도 모두."


진짜 바다가 보인다. 모든 걸 집어삼킬 듯이 하얀 거품으로 위장을 한 커다란 괴물이 해안가 도로 곁으로 덮쳤다가 물러간다. 협박인가, 아니면 위장인가. 그 안에 빨려 들어가면 평안할까, 아니면 지옥의 시작인 걸까.




가까운 의원을 찾는다. 몰골이 처참한 남녀의 입장만으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대강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은 습기를 머금었다고 표현되지 못할 만큼 젖었다. 어떠한 것도 수습되지 않은 꼴에 접수대에 있던 간호사는 흠칫 놀라며 이상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일부러 작은 의원을 찾아간 것이지만 이런 곳은 영진과 유리 같은 남녀에게 낯선 곳일 수도 있겠다. 다행스럽게도 대기하고 있던 환자가 없어서 의사의 처치가 빠르게 진행됐다. 영진은 유리 곁에 서서 의사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한다. 의사가 무언가 잘못 건드리지만 해도 진료실이 난장판이 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맴돌지만, 사실 그건 의료진들만의 생각이었다. 영진과 유리는 그저 어른이 되지 못한 작은 영혼 들일뿐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알리가 없었다.

영진이 결제를 한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오는 그들의 뒤통수에 간호사들의 수군거림이 묻는다. 아무래도 근처 옷가게라도 들러 몰골을 정돈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영진은 그런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유리와의 동행에서는 예외가 되었다.


"경찰서에 급하게 갈 이유는 없지? 근처에 옷 가게라도 있는지 둘러보자. 우선 차에 타."


영진은 유리를 주차된 차에 남겨두고 나간다.


"따뜻한 커피 좀 사 올게."


"응!"


간결한 대답이다. 하지만 그 소리는 우렁찼다. 영진은 차에서 내리다 말고 돌아본다. 유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유리를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진은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이런 미친놈! 결국 너도 똑같은 미친놈이야!'


영진의 혼잣말은 유리가 듣지 못할 테지만 왠지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이 와중에 남자라고 고개를 쳐든 감정이 이성의 끈을 자를 뻔했다. 유리의 사정이야 동네에서 떠드는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물론 부풀어진 부분도 많지만 사실 당사자에게 설명을 듣지 않는 이상 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영진은 선입견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부해왔건만 지금은 사심이 많이 부가되어 그런지 유리의 상황과 그녀의 모습이 그저 인류애만으로 감당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리의 목덜미에 입혀진 쇄골, 그리고 그 쇄골에 내려앉은 긴 머리카락. 마른 몸에 비해 봉긋 오른 유리의 가슴은 눈에 띄게 라인이 잘 잡혀있다. 손목에 그어진 상처들은 1년 동안 그녀의 삶을 보여주지만 사실 그런 건 영진에게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슬리퍼를 신은 그녀의 발에 하얗게 드러난 가느다란 발목 또한 영진의 눈을 사로잡았다. 유리의 큰 눈망울이야 바닷가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반했던 부분이고, 그 눈망울에 맺힌 눈물을 보고 영진은 곡 2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곡을 완성하는 내내 영진의 머릿속은 유리뿐이었다. 가냘픈 손목을 따라 겨우 쥐어진 술병과 그녀의 엉클어진 걸음걸이까지 모두 영진의 기억에 담아두었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간간히 드러나는 새하얀 목선도. 영진의 오만은 결국 감정선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주문한 커피를 양손에 받아 든다. 영진은 설레는 마음으로 주차장을 향한다. 어떻게 유리의 얼굴을 봐야 할지 영진 스스로만 난감하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무 상상도 하지 않은 것처럼 애를 쓰겠지. 걸음은 재촉되고 있으나 마음은 이미 영진의 모든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사랑의 아마추어처럼.


"꺄~"


유리의 비명이다. 영진은 들고 있던 커피를 던져두고 주차장으로 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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