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유리 08화

살아난 유리 조각 #8

by Cruel Ella

영진이 입을 연다. 유리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며 집중한다. 유리는 어떠한 일인들 자신보다 더하랴 싶었으나 영진은 뜻하지 않은 많은 얘기를 토해냈다.


"어릴 때, 아버지랑 단 둘이 살았어. 아버지는 화물운전을 하셨었는데 며칠씩 집을 비우는 게 일상이었지. 그나마 한 달에 한번 밥을 같이 먹는 게 다였는데... 1년 전에 돌아가셨어. 별로 슬프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야. 아버지 존재만으로도 내게 가족이 있다는 게 힘이 되고 있었나 봐."


어머니의 안부는 묻지 않는다. 이미 이야기 시작부터 어머니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것이다. 유리는 꼼짝도 않고 앉았다. 영진은 유리를 바라보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 나갔지만 유리는 영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유리는 모든 것을 자신이 대신 흡수해주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유리가 파 놓은 구렁이 더 깊으니 더 많은걸 담아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같은 오만일 수도 있겠다. 비가 내리는 습한 공기 속에서 영진의 목소리가 꽤나 깊게 울린다. 그 낮은 목소리에 담긴 울림은 낮에 노래했던 그 소리와 전혀 비슷하지 않다. 감미롭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건조함이 묻어난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많이 외롭게 큰 거지. 난 외동이었고, 아버지랑 단 둘이 살았으니 초등학교 때는 집에서 거의 혼자 지냈어. 고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랑 따로 살게 됐는데 서로 안부전화도 하지 않고 지내게 됐거든. 외로움으로 시작한 음악은 꽤나 잘 나갔고, 이미 작곡해서 팔아먹은 수입으로 부족하지 않게 지내고 있는 거야. 나름 재능은 있었던 거지. 난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그와는 별개의 인생으로 나름 만족하면서 살았어. 성인이 되니 아버지께 손 벌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수입은 있었고, 각자의 스케줄대로 살았으니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뭐하시면서 사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


남자 단 둘이 산다는 것은 꽤나 적적한 삶이다. 애정 어린 눈빛조차 기대하지 않아야 하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대고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외로움일까.


"화물운전이라는 것이 그래.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담보로 일을 하는 거야. 이상할 것도 없지. 일이 많을 때는 야간 운전 시간도 많으니까. 과로하지 않으려고 해도 나이가 들고 몸이 쇄약 해지면 과로사, 심장마비도 흔해.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신 거거든."


유리는 감아놓은 붕대의 압박을 느낀다. 영진의 말을 듣고 있으니 살짝 노곤해질 만도 한데 트럭, 화물 운전이라는 말에 약간의 불편함이 올라왔다. 잠시 잊고 있던 유리의 남편 사고가 떠오른 것이다. 가해자도 트럭, 화물 운전사였겠지. 뺑소니였던 그 사람을 잡으려고만 했었더라면 못할 짓이 없었을 그때, 유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슬픔에 젖어 시간을 흘려보냈다. 부모님이 계셨기에 사고처리는 신경도 안 쓴 터였다. 그게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아까 유리가 기억해냈던 가해자 차번호를 외쳤을 때, 왜 부모님은 아무 반응도 없으셨을까.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가해자를 찾지 않았던 것일까? 왜, 도대체 왜?


"크크크큭큭..."


유리의 웃음이 새어 나온다. 영진은 기이한 웃음소리에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조용히 얘기를 듣던 유리에게서 웃음이 삐죽 나왔을 때, 영진은 소름이 돋았다.


"그래, 계획적이었던 거야. 일부러... 크크크큭큭큭!"


"뭐야~ 너 왜 그래? 뭐가 계획적이라는 거야? 유리!! 정신 차려!!"


영진은 허공에 대고 기이한 웃음소리를 뿜어대는 유리의 어깨를 잡고 영진은 살짝 흔들어본다. 유리는 천장에 시선이 꽂힌 채 가닥가닥 흔들어대는 고갯짓을 한다. 유리의 눈에는 차츰 눈물이 고이고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에 영진의 표정은 굳어졌다.



새벽 3시 20분.


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검은 하늘에서 쏟아붓는 빗줄기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다. 한 발자국 내딛는 일에 용기와 조심성이 필요한 날씨지만 유리와 영진은 망설임 없이 집을 빠져나온다. 맨말의 유리에게는 삼선 슬리퍼가 신겨지고 영진은 젖은 운동화를 신었다. 짐이라고는 영진의 노트북이 전부다. 사실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이곳에 미련을 두고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산 같은 건 챙기지 않는다. 이미 젖기로 마음먹은 터라 빗속을 거니는 행동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각오했던 일이 비였을까, 아니면 감춰진 진실을 마주할 용기였을까.


영진은 차에 시동을 건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유리를 바라보더니 영진은 차에 여자를 태운건 처음이란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한다. 나머지 과거 이야기의 분량이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목적지 없이 차는 출발하고 동이 틀 때까지 무작정 달리기로 한다. 영진은 왜 유리와 동행하게 되었는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달리고 있다. 이유를 묻고 따져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저 시간 흐름에 맡긴 채 상황에 맞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저 이 여자에게 필요한 것들을 내어주고 있는 중인데 어느덧 한 공간과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


10개월 전, 음악 작업에 슬럼프가 왔었다. 그 흐름에 따라 내려온 낯선 동네. 4개월 전 이곳에서 우연히 유리를 봤다. 그녀도 낯선 동네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영진과 같은 영혼이었다. 상처는 누구나 안고 있는 짐 같은 것. 그러나 그녀는 슬픔에 젖은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내며 평범하지 않게 살고 있었다. 누구는 그녀를 '미친년'이라 칭하고 다른 이는 '정신병자'라고 불렀지만 영진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그녀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슬픔의 선을 넘어버린 유리에게 한두 마디 던졌을 뿐, 고의적으로 그녀를 쫒아다니려고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본 날엔 음악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한 마디도 지어낼 수 없었던 그곳에 그녀로 인한 흔적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덩달아 비어버린 아버지의 자리를 유리의 슬픔을 대신해서 그 값을 치렀다. 영진에게 유리는 슬럼프의 약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녀도 영진을 필요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영진 스스로 내심 기대를 했었는지 모른다. 영진은 지금의 동행이 싫지만은 않다. 인류애적인 행동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지만 사실 영진에게는 슬럼프 극복을 위해 필요했던 이벤트적인 삶일지도 모른다.


"좀 먹어둬. 두세 시간은 더 가야 해."


차를 잠시 세우더니 편의점에서 나온 영진은 레인지에 돌린 미적지근한 죽 하나와 시원한 생수를 유리에게 건넨다. 유리는 아무 말 없이 받아 들고는 손에 쥐어진 음식을 내려다본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거절하고 싶지 않은 호의다. 지금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영진에게서 유리가 바라던 부모의 모습이 담겨있다. 전에는 남편이 해주던 그런 따스함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곤 유리는 혼란스러워졌다. 남들에게는 다 내재되어있는 것만 같은 따스한 돌봄과 배려가 정작 유리의 부모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슬프면서도 영진이 옆에 있어서 안도할 수 있었던 이유임을 알게 된다.


"이 근처에 작은 가정의학과 의원 있어. 잠시 치료받고 올라가자. 아무래도 서울로 가야 할 것 같아."


"저기... 서울 구로 경찰서로 가."


"뭐?"


"병원 들렀다가 구로 경찰서로 가자고."


"..."


"치료받고 가면 납치로 오해받진 않을 거야."


유리는 차마 영진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못난 부모를 둔 부끄러움은 유리의 몫이 되었다. 분명 유리의 부모님은 실종신고를 했을 터, 거기에 영진과 나타나면 납치로 오해받기 쉽다. 이제야 유리는 자신의 부모님을 조금 알 것만 같다. 뺑소니 사건의 제보를 하기 위해 경찰서로 가는 것이지만 납치로 몰아 사건을 또 그르칠 수 없는 노릇이다. 남편의 사고 처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유리의 눈으로 확인을 해야 한다. 전달받은 정보라고는 부모님께 들은 이 한 문장이 전부였다.


"다 잘 해결됐어, 걱정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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