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40분.
유리는 한쪽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걷는다. 이미 맨발에는 피가 흥건하고, 팔뚝에는 꽤나 큰 유리 파편이 박혀있다. 창문으로 몸을 내던졌을 때 바닥에 떨어진 충격은 유리의 왼쪽 어깨를 강타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우선 이 마을을 벗어나 보기로 한다. 시골 동네 같은 곳이라 근처 편의점도 꽤나 거리가 있어 한적하기만 하다. 낮부터 모습을 드러냈던 불쾌한 비구름이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을 뿌려대기 시작한다. 마치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유리의 옷을 적신다. 유리는 일부러 대로로 나가지 않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다. 유리를 뒤쫓아 나온 아빠는 차마 유리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차의 라이트를 의지해 여기저기 두리번거린다. 곧 비가 제대로 쏟아지기 시작할 타이밍인 데다 어두운 밤인 것에 더해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졌으니 한밤중이라 해도 검은 가루처럼 채워진 것 같은 압력에 어둠은 그 본색을 제대로 드러냈다.
유리는 검은 골목길 한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았다. 저 멀리 아빠 차가 지나가는 것을 확인한 유리가 또다시 주저앉아 길 잃은 고양이처럼 비에 젖고 있는 것이다. 꽤나 멀리 뛰어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차로 따라붙은 시간을 보니 그 거리가 얼마만큼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가야 할 길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계획도 없이 무작정 도망 나온 이곳은 유리가 피신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오히려 이 동네를 대표하는 미친년이다 보니 어디로 가든 호의적일 것 같지 않아 그게 더 걱정이 됐다. 이 밤중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앞으로 비는 더 많이 쏟아질 텐데.
"아이쿠! 이게 뭐여!!"
집 앞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한 할머니가 유리를 보고는 깜짝 놀라신다. 그럴 만도 한 상황이라 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았다.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리에게 다가오신다. 우산을 쓴 할머니에게서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비 비린내와 섞여 유리에게 묘한 안정감을 준다.
"왜 비를 맞고 이러고 있어~ 어여 들어가자!"
할머니는 망설임 없이 유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으신다. 나머지 손으로는 유리에게 우산을 씌워주시고 일으켜 세운다. 유리의 맨발에 피를 확인한 할머니는 잠깐 멈칫하시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미 누구인지 알 것 같은 표정으로 유리를 품으신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사정을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는 것과 같다.
할머니 집으로 들어오게 된 유리는 집 안을 둘러본다. 우선 화장실이 어디인지 묻고는 거실에 핏물이 떨어질세라 냉큼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버린다. 할머니는 떨어진 핏물을 걸레로 닦으시더니 유리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 앞에 놓아둔다. 이 집은 좁은 주방과 거실이 연결되어 있고 작은 안방 하나 있는 집에 건넌방이 덤으로 붙어 있다. 옛 시골집과 별반 다르지 않은 흔한 구조다. 작은 마당에는 몇 개의 화분가 있었지만 유리는 보지 못했다. 긴 줄에 널려있던 빨래와 그 건넌방 앞에 있던 놓여 있던 신발도.
유리가 씻는 동안 할머니는 먹다 남은 된장찌개를 작은 뚝배기에 덜어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어제 볶은 무나물과 고사리나물을 작은 그릇에 덜고, 매실 장아찌를 고추장에 버부린 반찬과 갈치젓갈로 저녁상을 차린다. 아직 유리에게 어떠한 상황도 설명받지 못했지만 할머니는 자연스럽게 유리를 밥을 먹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따끈한 밥이 더해지니 시골밥상이라 해도 제법 든든해 보인다. 허리가 약간 굽은 할머니의 모습과 겸하여 바라보면 이미 배가 부를 정도로 정감 가는 장면이다.
유리는 머뭇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온다. 젖은 머리는 따뜻한 물에 젖어 한 김을 내뿜고, 뽀얗게 드러난 피부에 상처가 도드라져 보인다. 유리의 왼쪽 팔뚝에는 유리 조각이 박혔던 상처가 벌어져 있다.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는 게 보이지만 할머니는 유리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차린 밥상을 앞으로 내민다. 숟가락을 집어 유리 손에 쥐어주며 먹으라는 제스처를 해 보지만 유리는 여전히 어색하고 몸 둘 바를 몰라한다. 그래도 배는 고팠던지 한술 뜨려는데 갑자기 거실 문이 벌컥 열린다.
"할머니! 비가 오면 빨래를 걷어야지~ 또 까먹으셨죠! 매번 제가...어?!"
영진이다.
밤 11시 30분.
영진은 유리의 팔뚝을 보며 벌어진 상처부위에 거즈를 덮고 상처 부위가 벌어지지 않게 의료용 테이프를 붙인다. 그 위에 붕대로 감아 놓으니 솜씨가 제법이다.
유리는 건넌방 영진이 머무는 공간에 와 있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않으시고는 상을 치우셨다. 영진을 따라 건넌방으로 들어가는 유리를 살짝 돌아보긴 했어도 여전히 입은 다문 채였다. 밖에는 거센 비가 쏟아지고 할머니는 일찌감치 자리에 누워 불을 끄셨다.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유리는 굳이 할머니께 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유리는 처음으로 약을 먹지 않고 하루를 살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낯선 집에 들어와 육체의 양식을 공급하려고 할 때 유리는 영진을 보게 됐다. 그리고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뭐야, 갑자기 이 꼴로 나타나서는... 내가 감정에 충실히 표현하며 살라고 했지~ 몸 망가지게 살라고 한 게 아니잖아. 아이고~ 아프겠네. 내일 아침에 병원 가야겠다. 이거 꿰매어야 할 것 같아. 너무 벌어져있어. 다행히 지혈은 될 것 같기도 한데, 걱정이네. 지금이라도 응급실 갈까?"
영진은 상처부위를 보며 유리에게 계속 말을 건다. 무슨 일 있었냐는 말을 먼저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문 유리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아픔을 전달하는 신음뿐이었다.
"지금 움직이기 좀 곤란한 상황이면 좀 자요. 상처는 붕대 감아놨으니 우선 지혈은 될 거야. 내일 약 바를 때 상처 다시 봐서 안 되겠다 싶으면 여기서 갈 수 있는 최대한 먼 병원으로 가자고. 잠깐만, 여기 어디에 타이레놀이라도 있을 텐데... 지난번에 내가 사다 놓은 게.. 어딨지?"
유리는 두리번거리며 서랍을 열어 뒤적거리는 영진의 뒷모습을 본다.
"왜 여기 살아요?"
유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영진은 뒤를 돌아본다. 타이레놀은 이미 영진 손에 들려있지만 유리에게 내밀지 못하고 몸은 굳었다. 방 한편에 세워져 있는 기타와 그 옆에 몇 벌 되지 않는 옷이 옷걸이에 켜켜이 쌓였다.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 옆에 낮은 책상 앞, 둘은 그 좁은 공간에 마주 앉았다. 책상 위에 노트북이 있었지만 화면은 이미 꺼져있는 상태였다. 서랍이라고는 두 칸짜리인데도 약을 찾는 영진의 동선은 너무 컸다. 유리가 묻는 질문은 문장 그대로로 들리지 않는다. 영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과거를 모두 꺼내야 얘기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으로 유리를 바라본다.
"이름... 물어봐도 되나?"
"후훗. 미친년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그래도 이름이 낫지."
"유리예요, 김유리."
"이쁘네."
"당신은?"
"고영진."
"별로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잠이 들지 못하고 좁은 방 한 칸에 갇혀 서로의 숨을 느낀다. 약 기운 덕인지 유리의 고통이 가라앉을 무렵, 영진은 입을 열었다. 처음 고백하는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유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는 안도감이 영진에게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진은 벽에 기대어 앉았고, 유리는 이불로 무릎을 덮은 채 영진을 향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