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에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주저앉는다. 두통을 참아내느라 입술을 꽉 깨물어 보았지만 고통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결국 비명을 지르는 유리에게로 부모님이 달려온다. 쓰러져 있던 유리를 먼저 끌어안은 건 아빠였다. 큰 품으로 유리를 안고 비명을 토해내는 아이를 토닥이며 쓰다듬어준다. 우는 건지 고통스러워하는 건지 확실치 않은 울음이 터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유리다. 엄마는 그런 딸의 모습을 꼿꼿이 서서 지켜보다가 옆집으로 소리가 세어 나갈까 온 방의 문이란 문을 모두 닫아버린다. 유리방에서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짐승의 소리가 울린다. 그동안 이런 적은 없었다. 늘 조용히 사고를 치던 유리였는데 오늘은 온몸으로 토해내는 괴팍한 소리에 아빠는 당황스러워한다. 엄마의 손끝에서 전달되는 손길은 유리의 방 안에 있던 먼지조차 밖으로 새어나갈 수 없게 하겠다는 의지 같은 불순물이 묻어난다. 거실에서는 유리의 비명에 놀란 애견 뽀미가 짖어댄다. 엄마는 뽀미의 소리가 신경이 쓰이는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아빠, 나 생각났어. 생각났다고!!! 그 트럭 번호 말이야.. 나 알아!"
아빠는 눈물과 절박함이 묻어나는 유리의 헝클어진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나 유리의 말에 요동하진 않는다. 이미 예견하고 있다는 듯 담담한 아빠 표정에 유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죽인 뺑소니범을 잡을 수 있는 정확한 증거를 생각해 냈는데도 부모님은 유리의 발언에 반응이 없다.
"...아빠?"
유리는 한참이나 아빠와 눈을 맞춘다. 아빠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유리는 아빠의 말을 들은 것만 같다.
'그만해.'
차갑게 돌아서 나가버리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총총총. 다시 유리방으로 들어온 엄마는 한 손에는 물과 약이 든 쟁반을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뽀미를 안고 있다. 여전히 말이 없는 엄마에게서 약을 건네받은 유리는 손에 쥐어진 약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엄마는 뽀미를 진정시키느라 안고 있는 뽀미를 자꾸만 쓰다듬고 유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뭐야... 뭐가 이렇게 쉬워? 내가 트럭 번호를 기억해 냈다고. 그런데 왜 놀라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아? 뺑소니범을 찾을 수 있잖아. 내가 기억하고 있다니까! 경찰서 가서 진술만 하면 돼. 그럼 내 남편을 죽인 사람을 찾을 수 있어!"
아빠는 엄마에게 뭔가의 눈짓을 하더니 안고 있던 유리를 놓고 뽀미를 건네받아 안고는 나가버리신다. 유리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여전히 서 있고 유리는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유리에게 보이는 건 엄마의 발뿐이다. 엄마는 예쁜 수가 놓여있는 밤색 실내용 슬리퍼에 레이스가 달린 덧신을 곱게 신고 있다. 우아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장착이 되어 있는 상태다. 유리는 손에 쥐어져 있는 이 약을 먹어도 될지, 이 방에 계속 있어도 괜찮은 건지 혼란스럽다. 엄마와 단 둘이 남게 된 유리의 방은 유리에게 안전하지 않았던 공간임이 확실해졌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안전하지 않다. 화장대에 놓여있는 볼펜, 눈썹 칼, 옷걸이, 그리고 엄마.
"엄마..."
"아무 생각하지 말고 약 먹고 좀 자. 그러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거야."
"무서워..."
"여긴 안전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니, 엄마가... 엄마가 무서운 거라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유리의 말을 엄마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닫힌 창문을 커튼으로 가리고, 침대 이불 정리를 하고, 베개를 톡톡 두드리며 엄마는 유리에게 침대로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유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일어나 손에 쥔 약을 바닥에 세게 던져버린다. 엄마는 그런 유리를 한결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떠한 짓을 해도 이상할 거 없다는 눈빛이다. 어떤 행동이든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엄마는 반듯하고 단단히 서 있다. 유리는 그동안 그래 왔듯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것인지, 튕겨 나갈 것인지 고민한다. 이대로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유리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어깨와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간다. 긴장한 유리의 모습에 엄마도 뭔가 눈치를 챈 건지 유리를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온다. 갑자기 유리는 옆에 있던 창문 커튼을 거칠게 잡아당기고는 뜯긴 커튼을 엄마를 향해 던진다. 그리고 커튼에 덮인 엄마를 세게 밀쳐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졌다. 가녀린 체구를 생각하면 유리는 이를 악 물고 온 몸으로 엄마에게 반항을 한 것이다.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순 없어도 시도를 결정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리는 망설이지 않고 창문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 어차피 방문 뒤에는 아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