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9시 20분.
불어오는 밤바다 바람에 유리의 긴 치마폭이 휘날린다. 멀리 서 있는 가로등 빛에 흐릿한 검은 그림자 두 개가 길게 늘어섰고 바다 모래 위에 갸날픈 두 영혼이 가냘프게 서 있다. '미친년', '미친놈'이라고 칭하는 것에서부터 서로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어떤 형식으로 불리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 영혼들. 유리는 세상살이에 의미가 없고, 영진은 세상살이에 목적이 없다. 음식과 시간을 축내며 사는 짐승 같은 존재. 그게 유리와 영진이다. 하지만 영진은 유리와 다르다. 영진은 살고 있는 시간 사이사이에 재미를 채워가는 인생을 산다. 그래서 그에겐 악기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낄낄낄.... 동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거 못 들었어요? 나보고 미친년이라잖아~"
"그런 거, 진지하게 들어야 해요?"
"... 네, 들으...셔야죠."
"난 별로 관심 없어요."
그의 대답에 유리는 뭔가 손해 본 느낌이 든다. 엄마의 시선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부정당했다. 그것도 철저하게.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시선을 미개한 것처럼 취급해 버리는 그에게 관심이 생긴다. 그리고 이상한 희열을 느낀다.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게 좋은 건가? 에잇, 그거 재미없잖아."
"그쪽은 인생을 재미로 살아요?"
"재미라도 있어야죠."
"그쪽은 좋겠네요, 난 재미난 게 없어서 미친년으로 사는 것 같거든요."
"그럼, 내일 나랑 바다 보러 갈래요? 재미있게!"
"당신도 미쳤어요? 눈앞에 있는 여기가 바다잖아."
"훗! 이건 진짜 바다 아니에요."
"진짜 바다가 아니라니요?"
"당신에겐 감옥이지."
"...!"
감옥. 유리는 줄곳 그렇게 느끼면서도 감옥이라고 명명하지 못했다. 독립했던 자신이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정작 유리에게는 안전하지 않았다. 모든 생리들이 정상으로 돌아가게끔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계속 불구 상태였다. 그 속에서 가장 부족하고 이질감 있던 존재였던 것이다. 안전보다 위로가 필요했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척하는 것보다 적극적인 지지와 치유가 절실했다. 위로와 치유 없이 그저 밥과 약만 처방받는 이곳은 감옥이었다.
"내일 오전 10시에 여기서 만나요."
"어디로 가게요?"
"진짜 바다가 있는 곳으로!"
유리는 형체 없는 사람을 본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그가 서 있다. 진짜 존재하는 사람인 걸까, 아니면 죽은 남편과 같은 망자를 보고 있는 걸까. 사람 간의 대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망자와 나눈 대화처럼 영진의 목소리가 울린다. 울림 속에서 유리의 치마는 여전히 펄럭이고 파도는 끊임없이 춤을 춘다.
다음 날, 유리는 영진과의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꿈결처럼 이어졌던 장면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되었지만 왠지 현실에서는 일어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오늘도 유리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챙겨준 약을 먹고, 아침식사로 수프를 먹었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글을 쓰고, 엄마는 바닷가 주변을 거닐며 애완견 '뽀미'를 산책시켰다. 그것이 그들만의 안정적인 루틴이다. 아무도 시끄럽게 굴지 않고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각자의 스케줄이 있고 역할에 따라 움직인다. 책임감을 두르고 가면을 썼다. 행동에는 젠틀함이 묻어나지만 감정적으로 전달되는 정은 없었다.
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다가 슬리퍼를 신는다. 어제처럼 바닷가를 거닐 생각이지만 술병을 들진 않았다. 바닷바람은 어제보다 더 거세어졌다. 하늘은 불쾌한 구름이 가득하고, 곧 비가 내릴 것처럼 낮은 기압이 유리의 온몸을 쥐어짜는 듯했다. 유리는 날씨와 상관없이 산다. 이것저것 따지며 사는 인생이 아니다. 그런 풍파는 남편이 걷어줬었다. 이제 유리를 지켜줄 하늘이 없으니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벼락이 치든 맨 몸으로 맞을 각오로 유리는 하루하루를 견딘다.
"비가 올 것 같죠?"
영진이 말을 건다. 바닷가에서 유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다. 아마도 그에게는 시간이란 것을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유리에게는 그런 훈계를 해댈 자격이 없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영진을 째려본다.
"알아요, 비 올 거 알고 안 나오신 거잖아~"
존댓말 반, 반말 반. 섞어 쓴 문장이 묘하게 친근하다.
"나 기다렸어요?"
"설마..."
"안 나와서 실망하진 않으시고?"
"에이, 설마~"
"그럼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
"당신이 걱정돼서."
"내 걱정을 해요?"
"이젠 걱정 안 해요, 이렇게 나왔으니. 멀쩡해 보이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제 느꼈던 감정, 오늘 느끼고 있는 지금의 감정. 그걸 말한 것뿐이에요. 어려운가?"
"순간의 감정을 그렇게 솔직히 말하면서 살아요?"
"분명 존재했던 거니까. 거짓이 아니잖아요."
"..."
"감정을 오래 끌지 말아요. 그건 그냥 지나가요."
"간직하고 싶은 것도 있어요."
"그럼, 간직할 수 있을 만큼 길게 느껴요."
"그럼... 헤어 나올 수가 없잖아."
"그 감정이 나를 힘들게 만드는 순간이 오면... 간직하지 않으면 돼."
"어떻게 그리 쉬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무 모르시네."
"놓아버려. 생각보다 어려운 거 아냐."
"놓아 보내고 나면... 난 어떻게 살지?"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놓은 거라니까."
"슬프지 않기 위해 잡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데, 잡아서 슬픈 거였네."
"거기까지가 어렵지. 이제 마음의 힘을 좀 풀어요."
알 수 없는 대화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지도 않고, 이름과 나이도 밝히지 않은 누군가와 알 수 없는 대화를 했는데도 뭔가 서로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이어진다. 영진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유리를 탓하지 않았고, 유리는 아는 척해대는 영진을 불쾌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