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유리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는다. 화장실 안에 뿌연 수증기가 가득 찼다. 유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생산적인 일 없이 하루를 살고, 또 내일을 살 것이다.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 옹크려 앉는다. 물은 유리의 어깨를 덮어주진 못한다. 그 가냘픈 어깨 위로 수증기가 내려앉는다. 무게도 없이, 자연스럽게 안아주지만 유리는 그것마저 따스하게 느낄 수 없다. 지난 일 년 동안 친정집에 살면서 여덟 번의 자살 시도를 했었다. 방법은 다양했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시키지 못했다. 부모님의 시선은 오로지 유리를 향해 있었고, 어떠한 잔소리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 침묵의 무게는 이상하게 공포스러웠다. 부모님께서는 유리의 모든 걸 지켜주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걸 감시당하고 조종당했다. 부모님 시선에서 유리는 어엿한 성인이 아닌 것이다. 반대했던 결혼을 구태여 하더니 결국 실패로 돌아온 딸. 그 주홍글씨가 유리를 괴롭혔다. 말로는 '이서방, 이서방~' 했어도 단 한 번도 사위로 인정해준 적은 없었다. 장례를 치러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이다. 그런 분위기다, 이 집은.
오늘도 욕조에 커터칼을 들고 들어왔다. 하지만 차마 긋지는 못한다. 투명하고 맑은 물 안에 내 피가 가득 고인다면 어떨까 수백 번 상상을 했었다. 그렇지만 그 피가 모두 고이기 전에 유리는 응급실로 이송됐다. 끈적끈적하고 검붉은 피로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담글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도해 보고 싶다. 유리는 늘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장소가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이 집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마을에서는 사별한 어린 딸이 돌아왔다며 온갖 소문이 돈다. 사별한 딸은 맞지만 미치광이 여자로 몰아간다. 소문이란 것은 덧붙여지면 한계 없이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으로 비치든 유리는 상관없다. 사별한 여자인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별. 그런 고급진 단어도 쓰지 않겠지. 그냥 그 집 사위가 죽었대~ 정도?
"그 어린것이 결혼은 언제 한겨?"
"야반도주 아니겠어~ 그러니 부모가 반대해도 기필코 같이 산거겠지."
"결과는 뻔하지 뭐, 결국 저렇게 부모한테로 돌아온 거 아녀~"
"남자가 고아였다지~?"
"오토바이를 탄대나 뭐래나~"
"그럼, 유년시절 뻔한 거 아녀~"
"제대로 돈벌이나 했겠어~"
"부모 말 안 듣더니 저 모양인 거여~"
"남편 보내고 거의 미쳤다는 것 같어~ 제정신은 아닌 거지."
"정신과 다닌다는데, 아직도 그런거여?"
"무슨, 그냥 저대로 살다가 쟤도 죽게 생겼어."
"벌써 몇 번이나 구급차 왔다 갔잖여~"
"아이고, 그 부모는 뭔 죄여~"
"바닷가를 휘젓고 다니면서 미친년마냥 운다 아녀~"
"밤에 보면 무섭겄네."
"원래 미친년은 울어도 무섭고, 웃어도 무서운 법이여."
"낄낄낄...."
밤바다를 거니는 걸음이 익숙하다. 무서울 것 없이 앞으로 내달리는 걸음걸음이 불안해 보이지만 정작 유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맨발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비단 영진만은 아닐 것이다. 영진은 기타를 멘 채 숙소로 향하지 못하고 유리의 뒤를 밟는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못 본 체할 수 없었던 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어떤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때 돌아가면 된다. 그저 유리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에 그녀가 밟은 길을 따라 밟는다. 급할 것 없고 이뤄야 할 것도 없는 인생이다. 영진은 그동안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 그래서 이뤄놓은 것들을 손에 쥐고 있으니 그것이 성공인 것마냥 착각하게 된다.
가벼운 파도 소리가 들린다. 여기에는 하모니카 소리를 덧입혀지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밤바다는 특히 더 그렇다. 검은 하늘 위에 하얀색 파도 거품이 그려내는 그림은 그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색으로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 된다. 기타 소리까지 더해지면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유리는 맨발로 걷던 길을 멈추고 바다를 향해 몸을 돌린다. 그리고 한껏 크게 숨을 쉰다. 고요한 정적 위에 검은 파동이 인다. 남편의 흔적을 느낄 수도 없고, 호흡을 같이 할 수도 없는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버렸다. 내일도 해는 뜨겠지. 그러나 유리의 해는 이미 파멸해 버렸다.
"혹시 이 동네에 미친년 하나 있다던데, 알아요?"
영진은 서슴없이 유리에게 말을 건다. 아무렇지 않게, 원래 알던 사이처럼.
"아~ 그거. 훗! 날 말하는 건가?"
유리도 자연스럽게 질문을 되받아 친다. 아무렇지 않게, 원래 알던 사이처럼.
"맞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
영진도 만만치 않다. 대화는 계속 질문 형식으로 오간다. 누구도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다.
"미친년 만난 적 있어요?"
"미친놈 본 적 있지 않아요?"
"낮에 봤던 사람이 당신이에요?"
"낮에 울던 사람이 당신이에요?"
유리는 짐짓 놀란다.
"날 봤어요?"
"당신도 날 봤어요?"
"계속...."
"계속... 당신의 시선을 느꼈어요."
영진은 시선을 느꼈다고 말한다. 느낀 감정으로 사실을 전달한다.
유리가 바라본 영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영진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가벼운 한량의 모습이 아니다. 유리의 그리움과 한이 담긴 힘을 끌어냈던 사람이다. 눈물을 멈추게 하고 망자가 춤을 추는 상상을 하게 한 것은 영진의 연주였다. 유리가 넋을 놓고 바라봤던 것이 영진의 연주였는지 영진의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망자의 휘적거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유리의 시선 끝에는 닿은 영진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