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유리는 침대에 맥없이 누웠다. 일 년을 초점 없는 시각으로 세상을 봤다. 죽은 남편과 함께 여행 와서 봤던 바다와 다른 바다를 품고 산다. 나락으로 하염없이 추락하는 듯한 기분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으니 이젠 남편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보다 유리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더 크게 자리 잡은 듯하다. 존재에 대한 부정, 그리고 인생에 대한 허무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남편의 죽음은 유리의 세상에서 하늘만 없어져버린 게 아니라 유리의 존재도 같이 희미해지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인간처럼 살았던 것은 분명했으나 그 시간 안에서도 진정한 유리의 모습은 없었던 모양이다.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해맑게 웃었던 결혼생활은 꿈속 동화처럼 몽글함만 남았을 뿐, 현실이 아닌 몽상가의 그림처럼 유리의 가슴속에 박혔다. 어떤 욕심도 목적도 없이 즐겼던 시간이었다. 같이 먹고 웃으며 채워갔던 공간들 속에 남편의 호흡은 남아있지 않다. 그가 잡아줬던 손, 그 감촉. 그가 안아줬을 때 귓가에 느껴졌던 그의 숨소리 그리고 따스함. 그러나 지금은 냉한 공기만이 유리의 곁에 머물고 맴도는 바람마저 싸늘하다. 날씨와 계절 하고는 상관없는 스산함. 그게 지금 유리의 상태 그대로인 것이다.
눈물이 맺혀 또 운다. 시간에 잠겨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영진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고, 표현하라니. 온통 매서운 바람뿐인 곳에 갇혀 사는 기분을 영진은 알리가 없다.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아서 잠을 자고 또 자도 유리는 자동으로 쉬어지는 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남편의 기억과 감촉이 멀어져 가는 것 같아 슬펐다. 기어이 하루를 살아내고야 마는 유리의 인생이 수치스러웠다. 보상도 필요 없다 여겼던 그날, 사고에 대한 분노가 같이 올라온다. 언젠가 오토바이로 인해 그의 인생에 꽃 필 날이 있을 거라던 희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희망 같은 소리 하네!"
유리는 한마디 내뱉는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하기로 해놓고, 먼저 가버렸잖아."
나지막이 뱉어낸 말에 투정이 섞여 있다. 어쩌면 남편을 만나 하고 싶던 얘기가 시작된 걸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냄새가 그리워, 그리고 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허공에 말을 띄운다. 음률은 없지만 나지막한 유리의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린다. 듣는 상대가 없을 뿐이지 마치 그곳은 누군가 귀를 기울이는 듯 외로움에서 벗어나 있는 공간 같다. 지금의 감정을 표현하라는 영진의 말을 떠올리며 꾹꾹 눌러 담았던 일기 같은 문장을 풀어내 본다.
"사실 그날도 당신이 나오지 말라고 했었잖아. 춥다고..."
사고 당일을 떠올려본다. 기억을 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속 골방에 묵혀두었던 하루를 끄집어내어 나열해보면 정리가 될지도 모른다.
"안 나가려고 했는데 눈이 와서. 눈이 오니까 당신이 더 빨리 보고 싶더라고. 그래서 나간 거였는데."
그날의 일분일초를 기억한다. 지금의 일분일초와 같은 속도로.
"어그 부츠를 신을까 털 슬리퍼를 신을까 괜한 걸로 한참을 고민했어. 신발장에 있던 내 신발은 두 켤레. 나머지 슬리퍼는 당신 꺼였잖아. 그걸 내가 반듯하게 정리하고 난 털 슬리퍼를 신었지. 신고 나가면서 생각이 들었어. 괜히 털 슬리퍼를 신었다고. 당신이 보이면 달려가 안아주려고 했는데 슬리퍼는 달릴 때 불편하잖아. 괜히 투덜거리게 되더라고. 그러니까 더 춥게 느껴지기도 하고."
허공에 쏟아낸 유리의 목소리가 가득 채워지는 중이다. 목소리는 조금 더 커졌고, 유리의 눈빛은 뭔가 더 또렷해졌다. 그리고 안 쓰던 생각의 회로를 쓰려니 힘이 좀 들었는지 배고픔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유리는 깨어진 조각을 차분히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파트 입구가 보이는 그 화단 거리 알지? 거기에서 당신을 봤어. 신호대기로 서 있는 오토바이 한 대는 무조건 당신이야. 난 알아. 당신은 워낙 반듯한 사람이라 허튼짓도 융통성도 없이 살잖아. 신호대기로 서 있는 오토바이를 보니 영락없이 당신이더라고. 내가 사준 돌고래 인형 고리를 어울리지도 않게 오토바이에 달고 다녔잖아. 킥킥...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참 아기자기했네."
어렸기 때문에 할 수 있던 연애의 유치함을 만끽하며 즐거웠던 결혼생활이었다. 성숙한 남녀가 아니라는 것쯤은 당사자들도 알고 있는 터. 그것이 부모님에게는 걱정거리로 비쳤겠지만 유리와 남편은 그것 자체로 재밌게 즐겼더랬다. 연애와 결혼은 한 끗 차이라도 되는 것처럼. 결혼의 무게와 책임감은 그저 사랑의 결실에 의한 결점 같은 것이라고 간단히 정리해 놓았었다.
"신호 받고 출발하는 당신을 보고 난 뛰었지. 털 슬리퍼가 약간 헐떡거리긴 해서 불편했는데 어차피 금방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니까 질질 끌면서도 종종거리며 뛰었던 것 같아. 나 그때 참 설레었는데. 그때 당신 보고 무지 반갑고 좋았거든."
분명 유리에게는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눈물이 고인채 미소가 지어지는 묘한 기분을 느낀다. 마치 과거 그때로 돌아가 신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랑말랑한 기분을 조금씩 느끼고 있는 중이다. 현실적인 감각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추억만으로 그때의 시간을 회상하는 것은 행복을 느끼기에 충분하다고. 그동안 없어져버린 그리고 무너져버린 하늘을 탓하느라 유리는 남편과의 좋은 기억을 하지 못했었다. 부재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에만 사무쳐 있다 보니 잊고 지낸 좋은 감정과 기억들을 묻어두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나타난 건 분명 트럭이었어. 신호 무시하고 속력을 줄이지도 않고 말이야. 어두웠어도 당신을 보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돼. 내가 봤어. 당신은 잘못 없어. 늘 당신답게 신호를 잘 지킨 거란 말이야. 그 트럭... 그 트럭 말이야... 내가 봤어... 내가 알아... 주황색에... 그... 서울 04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