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시고 계신 약 똑같이 처방해 드릴게요."
언제나 비슷한 멘트, 똑같은 약.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듯한 진료가 계속되는 가운데 의사는 유리에게 적극적인 치료나 행위를 권유하지 않는다. 약장사 같은 느낌도 있고, 지겹다는 듯한 귀찮음도 있다. 그러나 정신과 약은 보통 약국에서 쉽게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아쉬워도 병원에 와야 한다. 유리는 삶의 기대가 없다. 이런 형편없어 보이는 의사라 할지라도 유리에겐 그다지 감흥을 줄 순 없겠다.
"약 잘 챙겨 드시고, 음악이나 그림 같은 거 감상해보시는 것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 거예요."
3달에 한 번씩 정기진료가 있다. 정신의학과 진료를 시작한 지 일여 년이 지났지만 유리는 아직 일상생활이 어렵다. 삶의 의욕을 찾지 못하고, 매일을 넋은 놓고 산다. 결혼 후 독립해서 지냈었지만 남편이 떠난 후 유리는 부모님 계시는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바닷가 근처에 자리한 부모님 집은 아버지 퇴임 이후 공을 들여 건축했고, 부모님께서는 내려와 사신지 5년이 채 안됐다.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지, 이 서방이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겠어."
엄마는 가끔 철없는 소리를 하신다. 유복한 생활에 어려움 없이 지냈던 60여 년의 생활이 엄마를 철없게 만들었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은 엄마를 젊어 보이게 하지만, 엄마의 말은 나잇값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회복이 더딘 거라고 유리는 생각한다. 남편의 빈자리를 자꾸 들춰내는 엄마 때문에 유리의 상실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처음 결혼을 하겠다고 남편을 인사시켰을 때, 엄마는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았다. 젊은 남녀가 앞뒤 안 가리고 결혼으로 직진하는 모양새가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더구나 남편은 오토바이 레이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지도가 별로 없고 사람들도 잘 알아주지 않는 선수다. 워낙 그쪽 시장이 영국이나 이태리에서 유명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경기조차 흔치 않아서 어른들은 그저 중국집 배달이나 하는 천한 이미지가 더 강했을 것이다. 학생 때 공부 안 하고 그저 놀았구나, 하는 이미지. 남편은 워낙 깔끔하고 잘생기고, 성실한 타입이었지만 그런 것은 부모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저 어린 남녀가 객기에 치르는 결혼, 둘이 좋아 죽고 못살아서 부모님께 떼를 써가며 시켜달라는 결혼, 그게 전부였을 것이다.
외동딸인 유리, 그리고 천하 고아인 남편. 어느 부모가 그런 결혼을 흔쾌히 허락하겠는가. 야반도주로 도망하다시피 하여 서울에서 단칸방 하나 마련해 놓고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다. 부족한 것 많아도 그저 좋았던 결혼 생활, 20대가 아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 하나만 가지고 행복할 수 있었을까. 유리는 자신의 20대가 그렇게 찬란했던 순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 사람 아니었다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저 부모님 보호 아래 커가는 화초 같은, 크기만 커다랗게 자라나는 재배 식물 같은 생명이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유리의 하늘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래서 지금 하늘이 없는 세상에서 유리는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숨을 쉴 수가 없겠어서 읽던 책을 덮고 집 앞 바닷가로 나온다. 하염없이 일렁이는 파도 소리마저 지겹다. 이제는 여기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꾸 커져만 가고, 불어오는 바람에 더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들고 나온 술병에 입을 댄다. 꿀떡이며 넘어가는 알코올에 그나마 목구멍에서 알싸한 느낌이 든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다. 발걸음은 점점 휘청거리고, 원치 않은 눈물마저 하염없이 흐르는데 유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슬퍼진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신은 듯 만듯하게 걸쳐있는 슬리퍼, 그리고 간신히 잡고 있는 술병이 유리의 상태를 말해준다. 그리운 남편의 살 냄새, 그 사람이 그토록 좋아하던 오토바이도 부서져 남은 남편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고가 난 그날, 쓰러진 남편의 장갑을 벗기고 결혼반지를 확인한 순간. 잊을 수 없는 그 순간. 정말 남편이 아니길 바라며 장갑을 벗겼을 때의 그 차가운 느낌들 모두 생생히 기억이 난다. 남편인걸 알지만 아니길 바라는 마음을 엄마는 짐작조차 못하겠지. 유리는 그런 생각이 들면 들수록 더욱 외로워지고, 외로움이 견디기 힘들 때가 오면 어쩔 수 없이 술을 찾게 된다. 그때 남편 손에 껴 있던 결혼반지를 빼놓을 걸. 엄마가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쟁취해버릴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유리는 남편의 장례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회를 낚아 채 버린 부모님. 아이가 없는 게 천만다행이라며 위로라고 건넨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유리였다.
'아이라도 있었으면 당신을 기억해볼 수 있잖아.'
남겨진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 거짓말처럼 20대의 시간이 날아가버렸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순간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허망해지고 작아져버린 가슴을 부여잡고 오늘도 운다. 아무도 듣지 못할 울음을 토해내며 남편을 그리워한다. 따스하게 안아줄 유일한 사람이 없어져버린 현실이 가여워 또 운다. 제정신으로 살 수 없겠다 해서 들이켜는 알코올도 소용없다는 듯 비웃는다. 결국 혼자일 뿐이다.
"띵딩디리~ 링~"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타 소리에 고개를 들어 둘러본다. 아까부터 연주하고 있었지만 유리에게는 닿지 않은 선율이 2시간 동안 울음을 토해내고 나니 현실적인 감각이 돌아온 듯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100미터 즈음되려나? 젊은 남자 하나가 기타와 하모니카를 한 번에 연주하고 있다. 짧은 곱슬머리에 내추럴한 차림으로 바다를 향해 연주를 하고 있다. 유리는 웅크리고 앉아 술병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고개를 무릎에 기대어 앉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이미 엉망이고, 어디로 쓸려 내려갈지 모르는 방향 잃은 머리카락마저 눈물처럼 흘러내려 있다. 유리는 그렇게 한참을 앉은 채 남자의 연주를 듣는다.
바다의 차가운 바람이 몽글몽글 불어온다. 얼굴에 닿은 모래 섞인 구름은 유리의 목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앉는다. 기타의 선율 위에 하모니카의 멜로디가 섞여 묘한 소리를 내뿝는다. 가슴의 한을 어루만지듯 부드럽다.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지만 유리는 낯설지 않은 음악을 감상 중이다. 망자가 휘적휘적 거리며 놀고 있는 듯한 소리에 유리는 눈물을 멈춘다. 눈을 감고 느껴보려 하는 망자의 한은 유리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저 슬픔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움과 한스러움이 겹쳐 묘한 힘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둘은 바닷가 어느 곳에서 연주를 하고, 연주를 들으며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