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유리 12화

살아난 유리 조각 #12

by Cruel Ella

다음날, 오전 8시.


핸드폰이 없는 유리를 위해 영진은 아침 8시에 유리의 방문을 두드린다.


"30분 후에 출발할 거니까 준비되면 나와."


유리는 영진의 노크 소리에도 꼼짝 않고 그의 말을 듣고 있다. 유리는 이미 준비가 마친 상태다. 앞으로 영진과 유리가 해야 할 일. 그리고 밝혀내야 할 진실들. 또한 영진과의 관계. 어떤 것부터 정리하면 좋을까. 정리가 되긴 할까. 애초에 정리가 필요한 일인 걸까. 유리는 생각이 많아졌다. 지난밤 내뱉은 많은 독백 속에서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유리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무엇을 잡아야 내가 살 수 있을까. 어떤 진실이어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모든 일들이 남자에게 붙어 살아남은 기생충 같은 여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유리는 집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제대로 된 신발도 신지 못하고 잠옷 바람으로 나오는 바람에 할머니 댁에서 얻어 입은 옷과 훔쳐 신고 나온 삼선 슬리퍼가 전부였다. 지금은 영진이 사준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그가 사준 신발마저 유리의 것이 아니었다. 매 끼니마다 얻어먹는 식사와 교통수단인 영진의 차 기름값, 그리고 이 모텔비까지 모두 영진에게서 제공받은 것들이다.


"유리, 너... 무슨 생각인 거니..."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인데도 염치가 없어 대답을 듣지 못한다. 유리는 일어서서 거울 앞에 선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 한 없이 작아져버린 여자를 바라본다.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8시 30분, 시간에 맞춰 방 문을 나선다. 영진은 문 앞에 서 있다가 인기척이 나자 벽에 기대어 섰던 몸을 추스른다. 유리에게는 아무런 짐도 들려있지 않다. 영진은 노트북 가방을 메고 유리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에게 던져진 짐들이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은 생각에 영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한다. 사실 그 짐들 속에는 정작 유리의 것은 없다. 유리는 영진의 등 뒤를 졸졸 쫓는다. 모텔 주차장에 세워놨던 차 안으로 들어서는데 남자는 운전석에, 여자는 조수석에 탄다. 원래 정해진 자리였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오늘의 하루도 녹록지 않을 것이다. 영진은 유리에게 음료수 한 캔을 건넨다. 유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자신을 챙겨주는 영진에게 또 신세를 지고 있는 듯하다.


"고마워."


"..."


"... 갚을 날이 있을 거야."


"기껏 음료수 하나 가지고 호들갑은, 그만둬."


영진은 유리에게 까칠해져 있다. 영진 스스로 생각해도 유리에게 미안해질 만큼 어제와는 다른 모습의 영진이다. 어젯밤, 영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편안하고 안락한 침대였지만 그 감촉은 너무도 차가웠다. 그 차가움 속에 자신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옆방에 유리를 두고 자신을 외로움에 처박아 두는 듯하여 도저히 침대에 누울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곡 하나를 마무리하기까지 힘겨운 감정과의 사투를 해야 했다. 깨끗이 샤워를 하고 보니 곱슬머리는 여전했고,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처참했다. 안에 채워진 모든 것들이 불순한 것 같아 보여 스스로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유리에게 사랑의 감정이 들다니! 사랑하면 안 될 여자는 아니지만 이런 와중에 말랑말랑한 감정을 만들어낸 본인을 용서할 수 없었다. 때와 장소가 맞지 않는다. 영진은 아직, 사랑을 시작한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하다.



오전 10시, 서울 구로경찰서.


유리와 영진은 이해할 수 없는 담당자의 설명을 듣고 경찰서를 빠져나온다. 복도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 사이로 둘은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경찰서라 그런지 거친 소음과 신음소리가 난무해도 유리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유리의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영진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말도 함부로 하지 않기로 한다. 차가운 복도 바닥으로 고꾸라질 듯한 유리의 자세를 보고 영진은 유리의 어깨를 살짝 잡아 세운다. 가냘프다. 울기라도 한다면 영진 품으로 끌어당겨 안아주기라도 할 텐데, 유리는 울지 않는다. 도대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유리의 뜻과 생각대로 되질 않는다. 신경회로가 멈춘 듯, 유리는 꽉 막혀버린 대뇌에서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부모님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것이 유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담당 경찰의 설명은 이랬다.


"사건 종결됐죠. 범인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님 두 분 모두 이 사건을 빠르게 종결시키길 원하셨어요. 위에서도 원하는 대로 해주라며 금방 덮어버렸죠. 그때 사인한 서류들 있을 텐데? 오셔서 사인하셨을 거 아니에요?"


유리의 기억에 남아있던 덤프트럭의 차량 번호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애써 달려온 시간들이 물거품이 되는 건 남편의 죽음처럼 찰나의 순간이었다. 유리는 이제 눈물도 나지 않는다. 영진의 고생을 뻔뻔함으로 일관되게 모른척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모든 것이 부모님의 손에 의해 종결되어 있었다니. 윗선에서도 빠르게 마무리 지은 것이 찝찝하기는 하나 유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아빠의 영향력이 비밀리에 발휘된 것만 같다. 유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다.


집을 벗어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자 마음먹었을 때 유리는 자신이 갖고 있던 열쇠가 감춰진 모든 진실을 꺼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도장 없이 통장만 가지고 가출을 감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설프고도 엉성한 이번 일을 영진과 함께 알게 된 것도 너무 싫었다. 유리는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이제껏 슬픔에 가려 있던 화가 올라온다.


"집으로 가야겠어."


경찰서 주차장 한가운데. 우뚝 서버린 유리의 얼굴 표정에 화가 묻어 있다. 유리의 목소리는 갑자기 어른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성숙하다. 부모님과의 정면 승부다. 우회하거나 도망칠 것 없다. 유리는 부모님을 피해 도망 나온 이후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처절하게 확인받고 나오는 길이다.


"우선 밥부터 먹자. 너 쓰러지겠어."


영진은 직진으로 내달리는 유리의 생각을 잠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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