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나요 #9

여자 친구?

by Cruel Ella

모든 것이 자연스러울 적엔 한 번씩 의심을 해봐도 괜찮다. 이대로 괜찮은지, 정말 나는 제대로 와있는 건지 확인하는 작업도 나쁘지 않다. 내가 그랬어야 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그럴 운명이다 생각이 들 때쯤, 낯선 여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의 뒷 번호와 같은 번호다. 여자의 감이란 것이 쓸데없이 작동한다.


"석우 오빠 여자 친구예요, 좀 만나요."


분명 여자 친구라고 했다. 그가 대기업에 취직한 지 한 달 만에 연락이 온 거다. 이미 난 그와 사귀고 있는데 여자 친구라니? 그동안 그에게서 다른 여자의 흔적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우린 모든 게 운명처럼 자연스러웠으니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카페를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맨다. 복잡하지만 체계가 잡혀있는 이 도시는 도대체 정이 가질 않는다. 힘들게 찾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헤매지 않은 것도 아니라서 괜스레 짜증이 난다. 이런 고급스러운 카페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 이런 일로 오게 돼서 더욱 자존심이 상해버린다.


갈색 긴 머리, 찰랑거리는 그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닿아 있다. 세련되게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에 늘씬한 다리를 자랑한다. 명품백을 든 그녀에게서 인위적인 향수 냄새가 풍겨온다. 약간 역겹지만 그런 냄새가 어울릴 만한 여자라고 생각한다. 네일아트를 화려하게 한 그녀의 손가락에는 4개씩이나 되는 반지가 껴 있다. 그러나 그중에 커플링이라고 할만한 반지는 보이지 않는다.


"3년 됐어요, 우리. 알고 있었어요?"


3년이란다. 설명을 들어보니 대학 C.C였는데 여자가 취직을 한 사이 내가 끼어든 꼴이 됐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 사이에 아이도 있었는데..."


임신을 했었다 말한다. 구태여 그의 아이였다고 덧붙여 설명한다. 나에겐 확인 사살 같은 거다. 그런 설명은 이 여자에게서 듣고 싶지 않다. 빨리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좀 구해달라고. 이런 무겁고 짓눌리는 듯한 분위기는 견디기 힘들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계속 옆에 있을 거예요? 좀 떨어질 때도 되지 않았나?"


내가 질척거린다는 듯이 말한다. 어울리지 않으니 이제 좀 떨어져 달란 소리 같다. 사실 그 말도 맞다. 난 외모로 보나 조건으로 보나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늘 갖고 있던 생각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확인받으니 죽고 싶은 심정이다. 현재 여자 친구로서 당당히 한마디라도 하고 싶은데 이런 경험이 없어서인지, 내가 자존감이 낮아서인지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들지 못한다. 혼나는 듯한 이 상황이 말이 안 되면서도 나는 그를 원망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이 여자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와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비련의 여자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남자 주인공과 사랑이 이루어진다. 보이지 않은 붉은색 실로 엮여 있는 운명. 난 현실에서 그런 운명을 바랐던 걸까. 난 그와 연결된 붉은색 인연이라 스스로 기대한 걸까. 날 설레게 한 첫 남자라서 더욱 그런 비현실적인 조건을 갖다 붙인 걸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그에게 난 첫사랑이 아닐 텐데... 그의 첫사랑은 나 같은 사람 일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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