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나요 #8

그 이름

by Cruel Ella

그녀의 이름은 '서지윤'이라고 했다. 흔한 이름인데 외모와 알맞게 어울린다.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이 들만큼.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내게 약간의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던 그녀다. 그것마저 솔직하게 드러난다. 숨기려고 해도 잘 안됐을 거다. 그녀는 머리 굴려가며 남자를 유혹하는 그런 부류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솔직함은 미련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순수하게 느껴지는 매력 중 하나였다. 아마 손이라도 잡아주길 바랬을지 모른다.


퇴근길. 지하철 창밖을 바라보며 서서 가는 길이다. 캄캄한 창밖에 볼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난 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넋을 놓고 생각을 이어간다.


'들어갈 때 맥주나 사갈까?'


지윤이는 맥주만 마셨다. 막걸리는 맛이 없다나 뭐라나. 막걸리에는 낭만과 추억이 곁들여져야 술술 넘어간다. 그러나 지윤이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캠퍼스 잔디밭에서의 막걸리 파티 추억도 없고, 친구들과의 우정 어린 취기도 없었다. 인생에 재미 따위 없는 여자 같았으나 난 지윤이 스스로가 그런 재미를 만들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맥주 한 캔을 산다. 이거면 충분하다. 집에 있는 안주라고는 김치뿐일 텐데도 지금 입맛이 도는 건 아무래도 힘들게 몸을 굴려댔기 때문일 거다. 지윤이와 함께 즐기지 못했던 막걸리는 버려두고 난 맥주를 택했다. 오늘 같은 날 막걸리에 지윤이 추억이 더해지면 내일 일어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반지하방은 습기를 머금고 삭막함을 두르고 있다. 살림살이라고는 별거 없이 냉장고와 널어놓은 빨래 몇 가지 그리고 이불이 전부다. 나는 집에 손님을 초대하지 않는다. 거의 숨어 지내 듯 지금 내 인생은 암흑이다. 작은 냉장고에는 생수 몇 병과 김치, 그리고 지난번에 형이 두고 간 참치 캔이 몇 개 있다. 싱크대 위에는 라면 4개가 놓여 있고, 냄비라고는 손잡이가 길게 달린 2인분짜리 작은 거 하나, 그리고 나무젓가락을 쓴다.


정막함 속에서 맥주와 김치를 꺼내 든다. 티브이가 없어서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켠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핸드폰 속을 구경하며 또 다른 꿈을 꾼다. 분명 나도 대기업을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삶 속에 파묻혀 있다. 지금 내 꼴이야 말로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한 순간에 바뀌었다. 모든 것을 앗아갔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이름을 묻는 내 물음에 그녀는 수줍은 듯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름마저 말해버리면 자신의 모든 걸 보여주는 거라고 느낄 만큼 힘을 실어서 또박또박. 철자 그대로 반듯하게 적어 넣은 핸드폰 안에 그녀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번호로 전화를 건다. 기본 벨소리로 울리는 그녀 핸드폰에 내 전화번호가 찍혔다. 흠칫 놀라며 나를 보는 그녀에게 내 이름을 말해준다.


"저장해둬~ 김. 석. 우."


이내 그녀도 내 이름을 번호와 함께 저장한다. 빙긋 웃는 그녀 얼굴 위로 내 얼굴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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