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나요 #6

의외의 인연

by Cruel Ella

같은 발랄함과 생기여도 느낌이 다르다. 여자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여자들만이 풍기는 매력과 기운을 안다. 이 여자는 순수함을 지녔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고귀함도 가지고 있다. 촌스러워 보이는 외모에서 천진난만함과 함께 닦아내고 깎아내면 만들어질 것 같은 보석의 반짝임이 보인다. 생각보다 괜찮은 여자를 낚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벼웠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난 어떤 진지한 만남을 원한 게 아니다. 이 여자는 그저 잠깐의 일탈이었고, 가벼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런 진지함은 날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이 여자, 결코 나를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


산책 코스라고 알려주며 데려간 곳은 공대 뒤편이다. 난 이곳을 잘 안다. 우리 대학 남자들이 대부분 어떤 흑심을 가지고 여자를 데려오는 곳이다. 어둡지만 결코 무섭지 않은 길이다. 낭만이 있고 비밀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길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에 가지고 있지 않은 대범함과 용기가 솟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자들은 대부분 연애 초기에 데이트 장소로 여기를 많이 추천한다. 덕분에 이곳은 은밀한 역사가 많이 쌓인 곳이 됐다.


이 여자는 잘 웃는다. 그다지 예쁘지 않은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 순간 화사하게 예뻐진다. 그 예쁨이 사라지면 또 웃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자꾸 말을 걸게 된다. 유머도 흔치 않은 말장난 수준이다. 21살이라고는 하는데 개그는 완전 아저씨다. 반전 매력을 뽐내는 이 여자를 보면 자꾸 웃음이 난다. 내가 하는 행동에 흠칫 놀라는 것도 귀엽다고 생각이 들지만 거기까지여야 한다. 난 자꾸 임신했다던 여자 친구를 까먹는다. 2시간 넘게 이 여자와 함께 걸으면서 내 일탈과 임신한 여자 친구와 대기업 취직 준비를 모두 잊었다.


고졸에다가 아직 백수인 이 여자의 일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건 위험한 신호다. 난 정신 차리고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 여자의 삶이 궁금해져서 더 이상 멈출 수가 없이 직진으로 내달린다. 조건도 외모도 나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든 것이 어쩌면 내가 원하고 있던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정신없이 재미있다가 순간 정신 차리면 나 스스로에게 당혹스럽다.


벤치에 앉는다. 별생각 없는 나와는 달리 이 여자는 생각이 많아 보인다. 수줍은 듯 움츠린 어깨 그리고 결코 쉬지 않는 입이 나를 즐겁게 만들고 있다. 눈과 귀 모두 즐거운 상태인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아무래도 그녀인 것 같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똑 닮았다. 평범하지 않았던 뒷모습. 그건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다. 붙잡을 수 없어서 더 아련히 바라봤던 모습이라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정리하고 있던 마지막 박스를 들고 갑자기 그녀란 확신이 든 순간, 첫 만남이던 그날 공대 뒤편 벤치에서의 결심과 같은 생각을 한다.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이 물류 센터에서 오래 일하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변화에 모든 것이 다시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더 이상의 발전과 가난을 벗어날 방법이 없이 또 갇히고 만 것이다. 내 인생은 늘 그래 왔단 생각에 억울해지더니 순식간에 분노의 감정으로 바뀐다. 그래도 이 마지막 박스는 던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손가락 끝에 힘을 준다.


마지막 박스는 제자리에 놓이고, 나의 인생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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