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나요 #5

첫 설렘

by Cruel Ella

그와 거니는 캠퍼스는 낯선 장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낯설거나 서로 어색하지 않다. 원래 친구였던 것처럼 얘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남들 눈에도 처음 만난 사이라고 보이진 않을 거다. 나에게는 그런 게 운명이었다.


사촌 언니에게는 친구랑 약속이 생겼다며 먼저 가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난 오늘 그에게 내 시간을 모두 내어줄 작정이다. 내게 이런 용기가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막상 이런 남자가 내게 다가오니 못할 것이 없어졌다. 나도 내 모습이 낯설지만 이런 무모함은 좀 필요하다고 스스로 설득한다.


잔디밭 주변을 지나 공대 건물 뒤편까지 우린 2시간이 넘도록 함께 산책을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개그라고 할 것도 없는 나의 말에 그는 잘 웃어줬다. 무엇이 그를 즐겁게 만드는지 모르겠는데 그는 연신 내 표정을 보며 귀엽다고 하고, 밝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긴장한 듯 내 어깨는 살짝살짝 올라갔고 그는 모든 스킨십이 거침없었다. 그는 선수임이 분명하다.


처음 느껴본 남자의 손길이었다. 완벽한 아싸 같은 내 인생에 큰 태양이 들어왔다. 외모는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달콤한 그에게 나는 푹 빠져버렸다. 내가 고졸인 것도 지금 백수인 것도 그에게는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난 그에게 이력서에나 쓸 법한 문장들로 평가받지 않고 있다. 그저 밝은 미래가 보장된 것처럼 내 인생에 빛이 나기 시작한다.


공대 뒤편에 있는 산책길을 따라 걷다가 벤치에 앉는다. 막 벚꽃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그곳은 나무가 많고 인적이 드문 길이라 연인들의 데이크 코스라고 설명을 이어가는 그에게서 갑자기 달콤한 벚꽃 향기가 난다. 나무 그늘진 시원한 벤치에 앉는다. 함께 걸을 땐 몰랐던 그의 얼굴이 나란히 앉으니 더 가까워졌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는 나를 보며 그는 또 웃는다. 지금 나는 내 모든 것을 그에게 들키고 있는 중인데 나는 그에 대해 전혀 알아가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를 만나 후 모든 것이 어떤 형태든 다 괜찮은 거다. 운명이니까.





그 사람일 거다. 난 확신한다. 얼굴에 작은 화상이 생긴 것도 내 눈에만 보인다.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작은 흉터지만 난 단번에 알았다. 그동안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소식조차 묻지 못하고 있었는데 15년의 세월은 그에게 야속한 시간들이었으리라. 그렇게 연락을 못하고 지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 때문에 그는 행복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차마 그를 잡을 순 없었다. 내가 잡는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자기 자리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은 채 휴식 시간을 갖는다. 틈틈이 내려가 그의 얼굴을 다시 확인한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그대로 달아난다. 난 그에게 나설 용기가 없다. 지금의 모습은 너무 초라하고 과거의 추억 따위 즐겁지 않을 것이다. 모른 척하면서 지내는 열흘 동안 내 안에 설렘은 15년 전 그대로지만, 그걸 숨기며 지내는 것 또한 스릴 있는 일이다. 난 지금 이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는 연극 무대의 여자 주인공 같은 느낌으로 지낸다. 지루한 나의 일상에 설렘과 긴장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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