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오빠, 나 임신했어."
전형적인 드라마 대사다. 그 말이 현실로 내 귀에 박혔다. 예상하지 못한 여자 친구의 말에 혼란스럽다. 사귀는 3년 동안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다. 그동안 우린 철저히 피임을 했다. 혼전임신은 내 인생 계획에 없던 일이다. 난 아직 대학 졸업도 하지 못했고, 여자 친구는 직장 1년 차였다.
"어떡할 거야, 이미 우리 부모님께 말씀드렸단 말이야."
항상 이런 식이다. 전화로 전해오는 그녀에게서 불쾌감마저 느껴진다. 그녀는 나에게 상의라는 걸 하지 않는다. 늘 일방적인 통보다. 이번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그저 한숨만 나온다.
우리 대학 3대 여신이었던 여자 친구에게 첫눈에 반해 고백을 했다. 거절할 거란 생각은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나도 그다지 빠지지 않는 외모에 싫으면 관두고란 심뽀였다. 여자 친구가 내 고백을 단번에 받아들였을 때 친구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나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사실 예쁜 꽃은 가지고 나면 금방 시들해버린다. 그리고 가까이하면 할수록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게 아름다울 거라는 기대감은 서서히 무너진다.
초반엔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데이트를 했다. 옆에 데리고 다니면 남들 부러운 시선을 즐길 수 있었고, 여자 친구도 내가 해준 모든 일들을 자기 친구들과 공유하며 자랑하는 듯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지함은 없었다. 나 말고도 다른 남자를 만나는 듯 여자 친구는 바쁘다며 연락도 잘 되질 않았다. 졸업시즌이 되자 예민함은 극에 달해 말조차 붙이기 힘들 정도였다. 직장인이 되고 나니 약속잡기가 더 힘들어졌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려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랑 일하는지 소개조차 꺼려했다.
사실 임신이란 것도 내 아이가 아닐 거란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남자 친구인데 의심부터 할 순 없으니 우선 잘 달랬다가 나중에 만나기로 하고 약속을 잡으려는 찰나 여자 친구는 결국 사단을 만든다.
"지울까? 그럼 오빠도 편하고 나도 편하잖아. 나 이제 직장 1년 찬데~"
여자 입에서 이런 말은 쉽나? 아니면 여자 친구에게는 별거 아닌 말인걸까?
"그럼 오빠가 저지른 일이니까 수술비는 오빠가 내!"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이 여자의 목소리. 정이 떨어진다. 더 이상 이 여자에게서 나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다. 부모님께 말했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임이 확실해졌다.
대학 성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아서 다음 학기부터는 대기업에 지원서를 넣어볼 작정이었다. 내 아이라 하면 대기업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러나 여자 친구와 아이를 책임져야겠단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억울해졌다. 나는 대학 내내 여자 친구뿐이었는데 내 아이가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시간을 사기당한 듯한 기분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 여자가 잔디밭 주변을 서성인다. 평범해 보이지만 대학생 같은 분위기는 풍기지 않는다. 혼자 온 것 같진 않은데, 오늘 인문학과 쪽 코스모스 졸업식이 있단 소식이 생각난다. 그 가족이 아닌가 싶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카락, 까무잡잡한 피부에 화장도 하지 않았다. 립글로스 정도 발랐으려나, 그래도 입술선은 예쁘고 생기가 돈다. 옅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요즘 대학생들은 저런 원피스를 입지 않는다. 엄마가 골라준 것 같은 올드한 느낌. 분명 대학생은 아니다.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화려했던 여자 친구 말고 평범한 여자. 내 눈에 들어온 한 낯선 여자.
다 태우지 못한 담배를 튕겨 버린다. 그리고는 무참히 발로 짓이긴다. 일탈이다. 오늘은 그런 기분이다. 더 이상의 이유와 핑계를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을 마음먹고 입에 남은 담배 연기를 내뿝었다.
가서 말을 걸어본다. 처음 여자 친구에게 했던 것처럼. 그러나 다른 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