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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기 없이 어색하게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조심히 가, 연락할게."
"응, 잘 지내고..."
담백한 작별인사를 했다.
눈물이 나거나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의 결말을 맞이했을 뿐이니까.
어쩌면 다시 만나는 날이 올 수도 있지만 그날을 기다리거나 간절히 바라지 않는 바였다.
내 삶은 시냇물 흐르듯 흐를 테니 늘 그래왔듯이 물살에 맡겨야지.
담백하고 허무한 작별인사를 하고 난 3달간 늘어놓았던 짐과 추억을 쥐고 disembarkation 절차를 밟았다.
여권을 돌려받고, 크루 아이디를 반납하고, 가짜세상 같았던 크루즈를 떠나 진짜세상으로 귀환했다.
집에서의 휴식도 잠시, 나는 거의 바로 스페인으로 갔고 그동안 D와 연락을 이어나갔다.
여전히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지만 능구렁이 근성은 카톡으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연락이 뜸해져도 잊을만하면 능청맞게 "남자친구 없지? 나 보러 호주 언제 와?" 묻기도 했고 인스타그램의 like로 서로의 근황을 알고 지냈다.
작별인사를 하고 1년쯤 지났을 무렵, 또 아무렇지 않게 연락이 왔다. 네덜란드에 엔지니어 트레이닝받으러 가야 하는데 유럽에 가는 김에 내가 있는 스페인에 오겠다는 연락이었다. 역시나 능청맞게 “만나줄거지~~?” 하며 스페인에 오는 날짜까지 툭 던졌다.
갑자기..?
굳이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잠깐 보고 또 각자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갈 거면서.
보고는 싶었지만 사실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곤란한 소식이었다. 나를 너무나도 좋아해 주는 학교 친구한테 매일 꼬심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단단히 선을 그어왔지만 내 철벽이 무색하리만큼 온갖 방법으로 표현하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던지라 그 친구에게도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던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 능구렁이를 만나면 그 친구보다 능구렁이가 더 좋을게 분명해서 그런 혼란을 피하고 싶었다.
일단은 알겠다고, 능구렁이가 스페인에 오는 날짜를 캘린더에 저장해 놓고 은근히 그날을 기다리면서도 당장 내 옆에서 지극적성으로 날 대해주는 친구를 보면 이 친구의 마음을 받아줄까 싶기도 했다.
그냥 능구렁이한테 만나지 말자고 할까? 아니지, 잠깐 보는 게 뭐 어때, 지금 옆에 있는 친구한테 미안해할 이유는 아직 없잖아? 갈팡질팡 나날의 연속이었다.
능구렁이가 오기로 한지 2주쯤 전이었을까, 엔지니어 트레이닝 일정이 바뀌면서 유럽에 오기로 한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 못 만나는 대신 한국에 갈 계획은 없는지, 크루즈 일을 또 할 건지 등 다른 방법으로 만날 방법을 모색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D는 아쉬워하면서 능글맞음을 쏙 뺀 말투로 1년 전을 후회한다고 했다. 웃음기 없이 잘 가라고 했을 때의 그 말투로, 크루즈에서 헤어질 때 나를 잡지 않은 걸 후회한다는 말을 했다.
그랬구나.. 내가 뭐라고 반응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어쩔 수 없지" 이런 식으로 얼버무려 넘어간 것 같다.
후회하는데, so what?
이번에 만났으면 붙잡았으려나, 옆에 있지도 못할 거면서?
후회되면 당장이라도 오던가, 유럽에 가는 김에 날 보러 오는 거까진 하겠는데 나만 보기 위해서 지구 반바퀴는 못 오겠다? 그럼 그 마음은 딱 그만큼인 거지 뭐.
어쨌든 나는 캘린더에서 능구렁이 스페인 오는 날을 지웠다.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안 될 사이였으니 이렇게 안 보는 게 잘됐지, 하는 후련한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없었던 일로 되었고 또 각자의 나라에서 살았다. D는 크루즈 엔지니어를 그만두고 호주에 정착했고, 나도 스페인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많이들 그렇듯 sns를 통해 몇 년간 실오라기 같은 연줄을 이어갔다. 한국에서 보자는 말도 큰 의미 없이 주고받았고 왜 연애 안 하냐고 서로 묻기도 했다.
내가 인스타친구 대거 정리(?)를 목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새로 만들었는데, 고민 끝에 D도 정리 대상에 포함시켰고 카톡 친구도 삭제하면서 실오라기 같은 연줄을 끊었다.
내 첫 크루즈 계약 때 만난 능구렁이 D. 첫 크루즈 이후에도 여러 번 크루즈에서 일을 했지만 D만큼 가까워진 이성은 없었다. 어차피 잘 안될 거라는 걸 경험했기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지낸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오랜만에 떠올린 추억이다. 9-10년 전이 먼 옛날처럼 느껴지지 않는 나이라 그런지 이렇게 회상하니 디테일하게 떠오르는 게 많다. 전남친도 아니고 스쳐 지나간 사람이라 이 이야기는 정말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는데, 스쳐 지나간 사람 치고는 내 추억에서 비중을 꽤나 차지한다. 고작 2주 "썸"만 탔을 뿐인데 말이다. 서른 넘으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혼자 다짐한 능구렁이 지금은 서른 넘었는데, 그런 능글맞은 멘트를 기억이나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