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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신쥬디 Apr 12. 2024

크루즈 썸남,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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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와 내가 친해진 시점으로부터 내가 떠나는 날짜 7월 26일까지 딱 2주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D가 배에 타자마자 서로 알게 됐더라면 한 달은 주어졌을 텐데, "미스터리의 동양인 엔지니어"로 2주를 흘려보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내게 굉장히 오랜만에 찾아온 설레는 감정이었다.

베짱이 같은 내 스케줄에 비해 근무시간으로 가득 찬 D의 스케줄이었지만, 우린 시간이 맞을 때마다 크루즈 내에 있는 스테이크하우스도 가고, 빙하 배경으로 같이 사진도 찍고, 같이 땅에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곤 했다. 둘 사이에 어떠한 약속은 없었지만 우린 당연하다는 듯이 같이 다녔다.


하루는 Juneau에 내려서 같이 초밥집에 갔다. 처음으로 같이 배에서 내렸던 날로 기억한다.

오랜만에 초밥을 맛있게 먹고 D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흡연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있는데서 담배를 피우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몇 발자국 떨어져서 담배 끊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때 능구렁이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친구 생기면 끊을 거야~ 누나가 내 여자친구 할 거야??"

....

아..

순간 당황했지만 나도 지지 않지!

"난 담배 피우는 사람 여자친구 안 해^^"


ㅋㅋㅋㅋㅋㅋ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대화였다.

그 후에도 흡연할 때마다 나는 잔소리를 했고, 능구렁이는 똑같이 받아쳤다. "여자친구 생기면 끊는다니까? 내 여자친구도 아니면서~"


걔는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했을까, 내가 흔쾌히 "여자친구 할래!"라고 하길 바랐던 걸까?

조금 더 진지하게 그런 질문을 했더라면 내가 yes를 했을지도, maybe? 아닌가? 모르겠다. 다른 걸 떠나서, 능구렁이가 흡연자인 게 난 싫었고 정말로 흡연자를 만날 마음은 없었으니까.


돌이켜보면 "롱디"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진 않았었다.

나는 미국, 능구렁이는 호주에 살지만 같이 크루즈에서 일을 하는 방법도 있었고, 미국과 호주는 지리상 멀지만 낯선 나라는 아니니까 누구 한 명이 옮기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가끔 나오면 같은 방향의 결론을 짓기보단 각자의 확고한 계획을 얘기하다가 흐지부지 마무리가 되곤 했다.

"나는 내년 여름까지 스페인에서 공부하고, 졸업하고는 미국에 살 거야."

"나는 크루즈 엔지니어 1-2년만 더 하고 호주에 정착해서 일할 거야."

누나가 호주로 와, 네가 미국으로 와, 이런 대화도 여러 번 오갔지만 그 누구도 홈 스위트 홈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알고 지낸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사이에 무슨…

이렇게 답이 안 나오는 대화만 하는데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될 리가 있나.


그저, 나는 여자친구도 아닌 주제에 담배 끊으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이었고

D는 남자친구도 아닌 주제에 내가 도미닉이랑 놀면 질투하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D가 불쑥 내 방에 찾아왔는데 마침 도미닉이 기타 치며 나랑 놀던 중인걸 보고는 정색하며 뭐라고 하기도 했다. 그때 난 똑같이 대꾸했다.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내가 떠나기 며칠 전, 마지막 데이트로 Haines에 있는 피자집에 갔다.

며칠 뒤면 내가 자기를 버리고 간다는 둥, 또 능글맞은 소리를 하더니만

서른 살 넘어서 자기가 싱글이면 나랑 결혼을 하겠다는 뜬금포를 던졌다. 정말 능글맞음의 끝판왕이었다.

"참나, 누구 맘대로?? ㅋㅋㅋㅋㅋ"

그렇게 D는 혼자만의 약속을 했다. 서른 넘어서 싱글이면 나랑 결혼을 하겠다고. 그때 나는 24살, 능구렁이는 23살이었다. 이런 능청스러움을 받아주는 것도 재밌었다. 속으론 씁쓸했을지언정 어색함은 없었다.

나는 서른 전에 결혼할 건데 무슨 말이냐며 능구렁이의 약속에 동조하지도, 크게 부정하지도 않았다.

당장 다음 주부터 우린 평생 못 볼지도 모르는데, 다음 주 얘기는 안 하면서 서른 살 얘기를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 또한 다음 주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피자를 먹으며 깔깔거린 마지막 데이트 이후엔 같이 놀 시간이 얼마 없었고, 내가 크루즈를 떠나기 전날 밤이 다가왔다.


나를 포함한 많은 크루들이 떠나기 전 날이어서 Officer's Bar는 굿바이 파티로 북적일 예정이었다.

파티보단 능구렁이랑 놀고 싶었지만, 정든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해야 했기에 그 자리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Officer's Bar에 잘 가지 않는 D였지만 그날은 잠깐 얼굴을 비추었다. 내가 친구들이랑 사진 찍고 떠드는 동안 D는 코카콜라 한 캔을 들고 구석에서 엔지니어들과 잠시 얘기를 하더니만 이내 자러 들어가겠다며 “내일 아침에 전화할게"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일찍 들어가는 그에게 서운했지만 쿨한 척 보내주고 늦은 새벽까지 친구들과 굿바이 파티를 즐겼다. 크루즈를 떠나는 게 진심으로 아쉬웠다. D도 D였지만, 그 외에도 좋은 친구들이 너무 많았기에 3개월간 쌓아온 추억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는 게 너무 섭섭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새벽 2시까지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롱헤롱 방으로 돌아왔다. 미리 짐을 다 싸놔서 텅 빈 방이었다.

정말 마지막 밤이구나, 내일이면 집에 가는구나..

Disembarkation process를 위해 6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못 일어나면 어쩌지... 하면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었으려나, 방에 있는 전화기 소리에 깼다. 나를 깨우려고 전화한 D였다.

지금 출근해야 한다며 인사를 하러 오겠다고 하고는 내 방으로 찾아왔다.

나는 잠도 술도 덜 깬 상태로 하얀 overall 작업복을 입은 D를 맞았는데, 평소엔 실실 웃으며 능글맞게 굴던 D였지만 그때엔 웃음 기가 없었다. 처음으로 공기가 어색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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