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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신쥬디 Apr 05. 2024

배에 살면 문득 생각나는 그 사건, 세월호


2015/6/25

아침엔 stairway guide training이 있었다.

한 번도 일기에 쓴 적은 없는 거 같은데, 크루즈에서는 수시로 safety drill을 한다. 처음 왔을 땐 정말 지겹도록 교육을 받고 온라인 테스트도 봐야 했다. 크루들은 비상시 승객들 대피를 돕는 역할을 각자 갖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stairway guide: 말 그대로 계단에서 사람들 이동경로 안내하고 traffic flow를 돕는 거다. 난 아직  신입 크루라서 역할이 없지만 언제 배정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임무를 배우는 중이다.

새로운 승객들이 탈 때마다 승객들도 대피훈련을 필수로 한다. 배가 출항하기 전, 드릴 알람이 울리면 모든 승객과 크루는 정해진 공간에 모이는 훈련이다. 승객들은 객실 키카드에 쓰여있는 지정된 집합 공간으로 모이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방송으로 여러 번 안내하지만 듣는 사람이 얼마나 없는지 알 수 있다) 크루들의 안내가 필수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집합하면 간단하게 구명조끼 입는 방법 등의 안전교육이 진행된다. 나도 크루로서 구명조끼 입는 방법을 시범으로 보여준다.

우왕좌왕하는 몇천 명의 승객들을 안내하는 건 굉장히 정신없고 피곤한 루틴이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필수로 해야 하는 훈련이다.

승객들 drill과 별개로 3주에 한 번꼴로는 모든 크루 대피 훈련이 있다. 알람이 울리면 구명조끼를 입고 지정된 구명보트 위치로 가야 한다. 난 길치라서 내 구명보트 위치 찾는데 지난번 drill까지만 해도 헤맸는데 이제는 드디어! 빨리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ㅡ.ㅡ 구명보트 위치에 가면 오피서들이 랜덤 질문을 한다. 소화기 사용법이라던지, 구명보트에 탈 수 있는 최대 인원, 비상식량 분배 방법 등등. 드릴 때문에 땅에서 노는 시간도 뺏기고 너무 귀찮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나 같은 길치도 비상시에 길을 잘 찾아 살아남지.


배에 있으면 세월호 사건이 가끔 생각난다… 구명조끼 착용 방법은 알려줬을까? 대피훈련이란 걸 하긴 했을까? 선원들은 승객을 돕는 역할이 있긴 했을까? 나 같은 신입도 비상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가야 하며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심지어 승객들 구명보트 리스트까지 내 구명조끼에 붙어있는데.. 세월호엔 안전규칙이란 게 있긴 했을까? 대피훈련 한 번만 했어도… 달랐을 텐데…

깜깜할 때 바닷물을 내려다보면 진짜 무섭다. 세월호 생각하면 너무 맘 아프고 괜히 미안해지면서 한국인으로서의 pride도 확 죽었고 한국에 대한 관심도 솔직히 없어졌다. 미국에 살면서 늘 한국을 그리워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이젠 우리나라 역사와 우리만의 언어가 있다는 거 말고는 자랑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다….ㅎㅎ 사람들 보고 싶은 거 외에는 한국이 그립지도 않다. 그냥 지금처럼 미국 사회에 잘 섞여서 살고 싶다.ㅎㅎ


6/26

케치칸에서 sea kayaking을 했다! 이름 까먹은 바다생물들이랑 불가사리 많이 보고 독수리도 보고, 동물원이 아닌 야생에 사는 생물들을 노 저으며 열심히 봤다. 팔이 너무 아팠다.. 등산하느라 다리 아프고 노 젓느라 팔 아프고, 알래스카 원주민인 줄 알겠네. 나 피아노 치러 온 건데. ㅋㅋㅋㅋㅋㅋ

아침엔 스테판한테 갑자기 연락이 와서 같이 오케스트라 앨범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다. 응? 잠깐의 전화통화 끝에 verbally 계약(?)을 맺었다. 음… 수동적인 나에게 이런 제안은 참 고마운 기회다. 앨범이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오케스트레이션은 내가 나중에 하고 싶은 분야니까 열심히 해봐야지.ㅎㅎ

오후엔 Dancing through the decades 테마로 공연을 했는데, 새로운 보컬리스트 Darlene은 무대에서 기분 표현이 너무 드러난다.ㅠㅠ너무 grumpy 해서 같이 무대에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다. 애슐리 그립다!


6/27

오늘은 sea day. 낮에 한 시간 동안 재즈 긱을 했다. 오늘은 Diego랑 James 마지막 날.

제임스가 떠나는 게 아쉽지만 한편으론 빨리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만나고 싶다.ㅠㅠ 나 원래 재즈기타 좋아하는데 제임스랑 할 땐 힘들다. 왜 자꾸 이상한 이펙트를 넣는 거야 시끄럽기만 하게! 그냥 깔끔한 톤으로 연주하지 ㅠㅠ 새로운 기타리스트는 덜 aggressive 하고 깔끔하게 연주하기를!!

디에고가 떠나는 건 너무 아쉽다. 슈퍼마리오 같은 디에고. 독학으로 professional bassist가 된 디에고. 항상 Hey Shude~하고 나를 부르는 웃긴 디에고~ 아르헨티나 스패니쉬를 가르쳐준 디에고~ 밴드에서 제일 친한데 떠난다니, 힝ㅠㅜ 이제 연주할 때 누구랑 눈 마주치고 그루브 타나..!!!! 배 라이프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구나~~~ 나도 한 달 뒤엔 이 모든 걸 떠나는구나..!



6/29

최근에 조금 친해진 엔지니어 Jelmer가 엔진룸 투어를 해줬다. 엔지니어들은 항상 더러워진 하얀 overall을 입고 돌아다녀서 도대체 저 사람들은 저 옷을 입고 뭘 하는 걸까 싶었다. ㅋㅋㅋㅋ 약속한 시간에 Jelmer를 만났는데 쪼리를 신고 갔더니 엔진룸에선 무조건 shoes를 신어야 한다며 헐떡거리는 사이즈의 신발을 빌려줬다. 헤드폰처럼 생긴 거대한 귀마개도 쓰고 비밀의 장소 같은 엔진룸에 들어갔다. 공장 같은 곳에 더러운 점프슈트 입은 엔지니어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ㅋㅋㅋ

무슨 기계들인지 설명을 들었지만 듣는 순간만 좀 흥미 있었지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ㅋㅋㅋ 그중 풉 머신을 본 건 기억이 난다. 응가 정화기..라고 해야 하나? 마침 풉 머신 주변에 데이빗이 일하고 있었다. 개미처럼 일하는 내 친구들, 그런 일 하고 있었구나! 열심히 해!! ㅋㅋ

건물 하나가 바다 위를 떠다니게 하려니 얼마나 다양한 기계들이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을꼬.. 바다 한복판에서 몇천 명의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엔진룸은 크루즈의 심장이구나, 배 지하 구석에서 엔지니어들 진짜 중요한 일 하는구나 새삼 느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일 하는데 매일같이 밤에 술 마셔도 괜찮은 거야..? 나 안전한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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