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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신쥬디 Apr 08. 2024

크루즈 썸남,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

타이밍 한번 참

 공개적으로 크루즈 일기를 쓰며 시시콜콜한 근황을 전했지만, 이 이야기는 그 어떤 일기에도 공개하지 않았다.

어쩌면 2015년 3개월 크루즈 생활 중 가장 아련하게 남은(?) 추억을 9년이 지난 지금 꺼내볼까? 헷.



7월 어느 날, 평소에 늘 다니는 A Deck 복도에 뉴페이스가 등장했다. 흰색 overall을 입은 키 큰 동양인. 동남아시아인 아니고 한중일 계열의 동아시아 남자.

어라? 이 배에 동아시아인은 나뿐인데, 나와 동족인 크루가 새로 왔나? 중국인 같기도, 한국인 같기도..?

그렇게 몇 번을 복도에서 지나쳤다. 가끔 Officer's bar에서도 보이곤 했다. 때탄 overall 입은걸 보니 엔지니어겠구나. 동족이라 반가웠고 궁금했다. 한국인일까? 분명 그 사람도 오며 가며 나를 봤는데, 내가 한국인인걸 알까?

미스터리의 엔지니어는 늘 혼자 다니는 듯했다. 다른 엔지니어들은 틈만 나면 모여서 술 마시고 노는데,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배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동료들이랑 안 친한가?


그렇게 머릿속에 물음표 띠옹 하고 있던 어느 날, 도미닉이 나에게 Korean 엔지니어가 왔다는 얘기를 해줬다.

궁금증 해결!!!

한국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반가웠다. 한국어를 잘 못하는 한국인일 수도 있지만 괜찮아, 몇 달 만에 보는 코리안인가!!

또 마주치면 말을 걸어봐야지 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일-숙소만 반복하는듯한 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며칠을 그냥 흘려보냈다.

마주쳐도 안 반가운 엔지니어들은 틈만 나면 보이는데 왜 코리안 엔지니어는 안 보이는 건지 나참.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티백을 가지러 Officer's Bar에 갔더니 코리안 엔지니어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다짜고짜 초면에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니지만 큰 용기를 가지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호주에서 이민 생활을 하다가 Marine engineer가 된 Korean-Australian이었다. (이름은 D라고 쓰겠다.) 영어로 얘기를 하다가 Do you speak Korean? Yes를 시작으로 친밀도가 급상승했다.

내성적이고 무뚝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친근했고 한국어도 유창한 게 첫 번째 반전이었다.

두 번째 반전은.. 내가 누나라는 점? ㅇ_ㅇ?? 이 사람이 나보다 오빠가 아니라고..???????

어딜.. 봐서..?...ㅋㅋㅋㅋㅋㅋㅋ

나보다 한 살 어린 D였다.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우린 금세 친해졌지만 D는 나와 다르게 근무시간이 많아 같이 놀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늘 땅에 내리는데, D는 그 시간에도 일을 했고, 나는 매 끼니마다 뷔페에 가서 먹는데, D는 작업복에서 제복으로 갈아입고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간단하게 Officer's bar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그리고 D가 쉬는 시간엔 내가 공연을 할 때가 많았다. 정말 개미와 베짱이가 따로 없었다.


D에게 크루즈는 그저 작업현장일 뿐, 여행도, 위층의 휘황찬란함도 그에겐 즐거움을 주지 않았다. 이미 몇 년간의 크루즈 엔지니어 경력으로 여행은 다닐 만큼 다녔고 이제 모든 걸 뻔하게 느끼는 듯했다. 크루즈 3개월 차인 나는 아직까진 이 모든 걸 누리고 싶고, 반복되는 일상이어도 즐거웠는데, D의 생활은 칙칙 그 자체였다, 적어도 나를 만나기 전 까지는.


D는 체질상 맥주 한잔만 마셔도 빨개지는 덕분에 술자리에 가지 않아 다른 엔지니어들과 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술자리에 가지 않을 뿐, 동료들과는 재미있게 잘 지내는 성격 괜찮은 자발적 아싸(?)였다.

그래서 술꾼들과 놀지 않고 그 시간에 나랑 놀았다. 

나보다 30cm가 큰 D는 큰 키 덕분에 제복을 입으면 사람이 달라 보였다. 장대 같은 북유럽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크루즈였는데 그 사이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는 기럭지의 소유자여서, 제복을 입은 모습은 참 멋있었다. 그리고 첫인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능글맞았고, 어울리지 않게 애교도 많았다. 좋아한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능글맞음과 솔직함 그 사이 어딘가의 언어로 서슴없이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D를 능구렁이라고 불렀다.

나는 한 번도 연하를 좋아해 본 적도, 좋아할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오빠처럼 생겼지만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D는 "동생"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2주 뒤면 나는 이 모든 걸 떠나 집으로 가야 한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왜 하필 이제야..? 난 여기에 두 달 동안 있었는데.. 왜 끝자락에 나타난 거야?


배엔 크루 커플이 많았다. 국적도 직업도 다른 사람들이 커플이 되어, 이 배 저 배 옮겨 다니며 롱디를 하다 끝끝내 헤어지는 커플이 대부분이지만 결혼을 한 커플도 몇 쌍 탄생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나는 "크루즈 커플"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 불안정한 상황을 감당할 만큼의 strong feeling이 내겐 생기지 않을 거라 믿었고, 혹여 생긴다 하더라도 순간적인 감정에 속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난 2주 뒤에 여길 떠날 테고, D는 3개월 후에 호주로 돌아가겠지. 나는 당분간 학교를 다녀야 하니 크루즈에 탈 일은 없을 테고, D는 계속 바다 어딘가에서 일을 하겠지. 그렇게 우린 각자 살아가겠지.

그렇게 결말을 정해놓았다. 말은 안 했지만 D도 나와 같은 결말을 정해놓은 듯했다.

하지만 2주라는 짧고도 긴 시간이 우리에겐 남아있었고,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능구렁이는 점점 더 능글맞아졌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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