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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깃글 Jan 30. 2020

잃어버린 이름

iPod을 찾았다

한 달에 한 번씩 ‘8월의 인기가요’와 같은 녹음테이프를 아버지에게 사 와 달라고 떼썼다. 지오디 몇 집이더라 ‘길’이 수록된 그 테이프도 기억난다. 카세트 테이프라고 불렀지.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대중음악을 듣는 걸 즐겼던 나에게 MP3는 혁명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128mb 용량의 삼성 yepp을 사려고 용돈을 모아 25만 원의 절반을 지불하고 절반을 아버지가 내주셔서 샀다. 다음 음악으로 넘기는 것 혹은 이전 음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mp3의 일부분을 돌리면 되었던 그 기술은 그 당시 나의 자부심이었다.

이후 다른 아이리버와 같은 다른 mp3를 거치고 sharp와 같은 스마트 전자사전, pmp와 같은 기기들은 내 손을 떠났다. 거기에 담긴 중학교 첫사랑과의 추억, 밤새 읽어댔던 전자사전 속 팬픽, 열심히 필기했던 근현대사 인터넷 강의.. 함께 잊혔다.

올해가 2020년이니까 5년 정도 된 것 같다. 스마트폰에 익숙하지만 나는 iPod touch를 구매했다. 평화로운 중고나라를 처음으로 이용했던 날. 괜히 그게 뭐라고 무서워서 장전역에서 직접 만나 기계를 받고 기록을 남기려고 휴대폰으로 계좌이체를 해서 거래를 했다. 32G니, 기본적 기능을 제외하고 26G 정도 되니까 좋아하는 노래를 마구 넣었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음악과 함께 두 시간이고 걷고 그랬는데 그 당시는 열심히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 그냥 집에서 갑자기 그 아이팟을 잃어버렸다. 몇 시간 동안 찾았지만 워낙 정리나 찾는 것이 젬병이기도 하고 새로이 아이폰을 구매하기도 해서 포기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번 설에 아버지가 아이팟을 찾았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물건을 잘 찾으신다) 동생 블루투스 이어폰을 찾아주다가 발견했는데 소파 사이에 끼어있었단다. 와, 대박! 충전해지니 기기가 켜졌다. 하지만 위기는 바로 찾아왔다. 기기를 열려면 비밀번호를 쳐야 하는데 5년 전 나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지금 사용하는 온갖 번호를 다 실패하고 60분의 락이 걸려 절망에 빠졌다. 분명히 모양으로 한 것 같은데. 네이버에 아이팟 비밀번호 분실을 검색해 아이튠즈로 복구방법을 찾아서 오랜 시간 뒤 리셋시켰으나 또 비밀번호를 입력하란다.

60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기회에 신중하게 과거의 나와 대화를 했고, 겨우 맞췄다! 그때의 희열!!

하지만 이미 복구 버튼을 누른 탓에 모든 음악은 지워졌다. 로그인하라는 애플 계정은 예전에 사용하던 것인데 그것으로만 입력을 요구해서 예전 계정으로 리셋되었다.

어떤 기능이 있었지? 이것저것 앱을 누르다 연락처를 눌러보았고, 아이폰과 비슷한 ui를 지닌 iPod touch에서 잃어버렸던 수많은 이름을 만났다.

11 김ㅇㅇ 12 박ㅇㅇ 09 신ㅇㅇ선배
같은 과에 이런 이름들이 있었지 그래.

임ㅇㅇ 꽃ㅇㅇ(별명) 나ㅇㅇ오빠
예전의 사랑, 상처, 관련된 연락처들.

기억 속에 묻혀있던 잊음들이 아이팟과 함께 갑자기 물밀듯이 다가왔다. 그들은 잘 있을까 라는 생각보다 이 연락처들을 떠내어 버리고 싶은 불편함이 들었다. 과거의 기억이 괴로워서가 아니라 현재가 좋아서. 잃어버렸던 그대로 잃어버리게 두고 싶어서.

 더 많은 이름들을 만나기 전에 전체 삭제를 눌렀고 내 사진으로 배경화면을 설정했다. 매번 부산을 내려갈 때마다 만날까 봐 조마조마했던 사람들.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받았던 지나간 인연들. 어쩌면 그 한 명 한 명과 관련된 이야기나 감회를 한 편씩 글로 써도 좋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나는 그 이름들을 이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잃어버린 이름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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