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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R Aug 06. 2017

그 애를 기억하며

새로운 시작에 설레었을, 내 동기로 대학을 다녔어야할 그 애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하기 전, 신입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등 각종 행사가 많았다. 비슷한 동네 친구들과 다니던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에는 자이니치(재일교포), 조선족 등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 중 중국에서 온 여자애들 둘이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조용한 그 둘은 우리 속의 한방울 기름같았다. 오리엔테이션 중 화장실을 오가다 그 둘과 마주쳤는데, 나는 중국어를 조금 할줄 알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말을 한번 걸어볼까 하고 머뭇거리다 그냥 지나쳤었다.


오리엔테이션도 마치고 나서는 입학식, 매일 새로운 만남, MT, 술자리, 강의... 정신없이 대학에서의 첫 봄이 지났다.


한숨을 돌리고 난 어느 늦봄 오후에, 강의를 마치고 친구들과 모여앉아 있다가 문득 '그 애'가 생각났다. 두 명의 중국 여자애들 중 한 명은 캠퍼스에서 오가면서 간혹 마주쳐 인사를 나눴는데, 다른 한명은 오리엔테이션 이후로 통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 중 주변 사람들 소식에 가장 밝은 친구에게 그 애에 대해 물었다.


언니, 강OO 이라고 중국에서 온 애 기억하지? 걔는 어떻게 지내?


친구는 표정이 굳더니, 그 애가 죽었다고 말해줬다. 오리엔테이션 행사를 마치고 정식으로 입학하기 며칠 전, 학교 주변 자취집에서 살던 그 애가 샤워를 마치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는데 미처 잠기지 않았던 현관문으로 남자가 들어와 그 애를 강간하고 살해했다고 했다. 오리엔테이션 때 그 애와 같은 조였거나, 행사를 진행했던 선배들은 모두 경찰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이 일은 아는 사람만 알고 묻어두는 사고가 되고 말았다.


너무 깜짝 놀라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날의 사건에 대한 기사도 많았다. 성범죄 전력이 있는 전과자가 그 애를 때리고 목졸라서 살해하고 강간했다고 한다. 순서가 이상해서 아무리 다시 읽어보아도, 여러 기사에서 모두 똑같이 말했다. 살해하고, 강간했다고 한다.


딱 한번 마주치고 지나쳤던 그애, 내가 말을 한번 걸어볼까 망설였던 그애, 가족들을 떠나서 타국에 공부하러 온 그애, 이제 막 시작될 대학생활에 설레었을 그 애, 내 동기로 학교를 다녔어야할 그 애... 그 애는 이곳의 많은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잊혀졌다. 그러나 그날 오후 무슨 까닭인지 그애가 문득 생각나는 바람에, 내게는 그애가 선명한 빈 자욱으로 남았다.


누구든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고 처참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애는 그렇게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잊혀져서는 안되었다는 생각을 뒤늦게 한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끔찍한 잔혹함, 누구든 걸리는 사람은 희생되어야 하는 말도 안되는 부조리함, 남은 사람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맛보아야하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했는데.


3월, 매해 새로운 시작이 있는 설레는 계절.

우리는 오직 멋진 날들이 펼쳐지리라는 거짓말 속에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애를 지워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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