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이 아닌 직장인으로
나는 대학 졸업 후 한 직장만 n년간 다녔다. 한 직장에 정착해있었지만 이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서로 하는 일이 다른 부서에 옮겨다니면서, 나의 직장 생활은 크게 3개 구간으로 나뉘었다.
1. (내가 원치 않았던) 인사인 시대
신입사원 시절, 부서배치 면담 중 인사팀 선배들은 내게 넌지시 “인사팀은 어때?” 하고 물어왔다. 당시 나는 상품기획 직군으로 입사했고, 솔직히 인사 업무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무슨 일이든 단박에 NO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아, 미처 생각해보진 않은 일이지만 선배들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유는 있겠죠...?” 하는 애매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결국 인사팀에 배치되었고, 싫은 걸 싫다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한 과거의 내 자신을 원망하며 몇년을 보냈다.
2. (나 이외에 누구도 원치 않았던) 상품기획자 시대
인사팀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은 내 능력이나 정치적인 수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상사 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외부에서 온 인사팀 임원은 현업으로 전진배치를 원하는 인력은 다 내보내라는 주의였고, 기회만 되면 현업에 가고싶다고 말하는 나는 1순위 이동 대상이 되었다. 나는 내가 소비자로서 가장 좋아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품을 다루는 팀에 가고싶었다.
마침 내가 가길 원했던 상품기획팀 팀장님과 단둘이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 팀은 나 같은 사람을 원하지도 않으며, 내 자신에게도 이 팀이 배움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차갑고 단호했던지 그날 나는 밥도 반이상 남겼다.
하지만 결국 그팀은 인원이 부족해져 인사팀의 권유대로 나를 새로운 팀원으로 충원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같이 일해야하는 팀 선배도 인사팀 경력만 쌓은 나를 탐탁치 않아해서, 그토록 단호했던 팀장님마저 그에게 나를 ‘품성이 좋은 친구’로 소개하며 한번 잘 가르쳐보라고 달래야 했을 정도였다.
3. (누가 원했는지 아직도 의문인) 전략기획가 시대
다행히 상품기획자로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나는 분명히 매출을 일으키는 실체를 만들고 있으며, 매일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유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팀원들과의 관계도 더 이상 바랄게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이번엔 뜻하지 않게 건강이 문제였다. 수술과 짧은 휴가 후에 다시 업무에 복귀했지만, 그 다음해 또한번 수술을 하게 되자 더는 건강에 자신이 없었다. 이제 내 커리어 따위는 산으로 가도 무방하고, 건강과 휴식만 챙기고 싶었다. 회사에는 ‘무슨 일이든 할테니 그저 6시 퇴근하는 팀으로만 보내달라’고 간청하고 인력 FA 시장으로 나왔고, 때마침 다수의 결원이 발생한 전략기획 지원부서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매일 6시마다 퇴근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10년에 못미치는 직장생활이 여러 개의 직무로 등분되다보니 그 어떤 직무에도 전문성은 딱히 없다. 또 세 개의 직무 중 하나를 선택해 이 길을 간다고 해도, 현재의 조직 안에서 쌓은 것만큼의 연차를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내가 해온 회사 생활의 양상은 프로페셔널 직업인이 아니라, ‘직장인’에 가까워졌다.
고용 안정성이 떨어지고, 정년 퇴직은 점차 사라져가는 시대, 직업적인 전문성을 갖추기 보다는 조직의 필요를 맞추도록 한정되어 있는 ‘직장인’의 길은 그다지 권장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직장인은 어떤 일을 핟든, 관리자의 지위에 오르기 전 일정 시점까지는 고용 안정성, 그리고 안정적인 현금 흐름이 보장되는 일의 방식임은 분명하다. 나는 개인 사업과 같은 모험을 감행할 자본도, 건강도, 대담함도 부족하여 우선은 이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기왕 이 길을 가기로 했다면 즐겁게, 또 성의있게 가보아야할테니 프로페셔널 직장인의 길을 계속 탐구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