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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정 Dec 08. 2023

불안, 나를 위로하는 것들



뜨끈뜨끈 팥찜질팩

군고구마냄새

엄마가 만든 생강청으로 생강라떼

보솜보솜 볼리비아 태생 알파카 

유우니 소금사막 암염을 뿌린 계란 후라이와 와인 한 잔

창 밖 멀리 산 보면서 멍

제때 도착한 오선노트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들 때 나는 지금 나를 위로하는 것들의 목록을 써내려보곤 한다.






며칠 전 꿈을 꿨는데 너무 기이했다.


아는(이라고 하기엔 현실에서 진짜 먼) 언니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에서 파티를 하고 있었다. 정원에 수영장도 있고 유럽의 어느 넓고 예쁜 집 같았다. 언니는 아이 둘과 남편과 아주 화목하게 살고 있었고, 나는 꿈 속인데도 와! 감탄하며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현실에선 전혀 본 적도 없는) 그의 남편이 갑자기 나를 불러내 황금빛 손목시계를 주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내가? 당신과? 그렇다. 그 세계에서 우린 불륜이었던 것이다.


이내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당신 부인은 아이들 때문에 집 곳곳에 cctv를 설치 해 두었으니 이 장면도 찍혔을 것’이라 경고했다.


그리고 언니가 정성스레 요리한 다이닝 파티를 하러 갔다. 언니는 온화한 목소리로 반겨주다 갑자기 남편의 불륜을 폭로하고는 세상 슬픈 표정을 지으며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그녀의 친구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둘러싸고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불륜의 기억이 전혀 없으므로 아주 당당하게 아니라고 하곤 그 곳을 나오려 했다.


그가 붙잡았다. 수영장에서 뭔가 이야기하려 했다. 실랑이 끝에 둘이 수영장에 빠졌다. 축축하다. 꿈에서도 서늘한 촉감의 물살이 느껴진다. 그 찰나 그의 아이들이 아빠를 찾았고 그는 냅다 물 속을 빠져나와 작은 냉장고 뒤로 숨었다. 그의 쪼그라든 몸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어라, 그런데 꿈이 1인칭 시점에서 전지적작가 시점으로 바뀌었다. 나는 나를 보았다. 위에서 내려다 본 나는 수영장에서 얼굴을 물 속으로 향한 채 둥둥 떠 있었다. 축 쳐진 팔다리, 처박힌 채 부유하는 뒷통수. 저항 없는 등. 죽었다. 꿈 속의 나는 죽었다!






꿈과 현실, 밤과 낮, 전주와 서울, 무대와 일상, 시공간을 넘나들고 있다. 뭔가 불온한 기운이 감돌고 내 우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챘지만, 나는 여전히 오늘도 아이 아침밥을 짓는다. 그래, 책임 질 일들이 내겐 있고 더 이상 몽상가가 아니다. 나는 서 있는데 세상이 뒤엉키는 기분이다.


누군가는 자꾸 묻고 나는 자꾸 숨기려다 들킨다. 누군가는 광야로 손을 이끌고 나는 고민한다. 나는 거기에서 뭘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저항과 반동이 내게 주기적으로 찾아오기에 하는 수 없이 중심을 잡기 위해 두 팔을 가른다. 이제 굳이 도망갈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게 무슨 징조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직업적인 것인지 환경의 변화가 올 조짐인지. 내면의 변화인지. 먼지 몰라 물을 수 없다는 것이 불안 요인 중 하나. 확실한 건 누군가 자꾸 이 전에 있던 곳으로 다시 나를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그런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위로가 되는 것들을 찾는다. 오늘의 강력한 위안은 알파카의 보송한 털과 사랑스런 정면 얼굴. 눈맞춤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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