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여행, 다른 기억들

후에에서 다낭까지 가는 기차, 베트남

by 구수정

그런 날이 있다. 여럿이 모이려다 누군가는 애인을 만나러 가고, 또 누군가는 갑작스레 일이 생기고, 그러다 셋이 남았다.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날, 이런 날은 밥보다 술이라며 밥을 건너뛰고 술집으로 향했다.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동시에 번쩍 하며 눈이 마주쳤다. 우린 한순간에 어떤 날 어떤 시간 어떤 공간으로 순간 이동하듯 빠져든 것이다.


"그래, 그때도 이렇게 비 오는 날이었지. 다낭, 다낭에서 그날도 너는 비가 온다며 밖으로 뛰쳐나갔어."

"그 호텔에 있던 날 아니에요?"


우리의 여행, 그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음에도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시간과 장면을 기억해내며 그때의 기분을 떠올렸다. 여름의 크리스마스였다. 수영복 차림으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쭈볏쭈볏 사진을 찍었다. 오늘만큼은 좋은 곳에서 자자며 고르고 고른 호텔이었다. 호텔 안 크리스마스 장식이 온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따스했다. 우기였던 베트남 다낭은 내내 비가 오지 않다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듯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다. 바로 오늘처럼.

"나는 다낭도 좋았지만, 기차가 정말 좋았어!"


후에에서 다낭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 마침 비가 내려온 세상이 촉촉하게 변해 있었다. 드르륵 열차 침대칸 문을 열자마자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꺄아~ 너무 좋잖아! 이런 침대칸 기차라면 열두 시간도 갈 수 있겠어!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향기로운 나무 냄새와 닳고 단 창틀의 나무 촉감이 세월을 말해 주었다.


도시를 벗어나 푸른 논이 펼쳐졌다. 창에 맺힌 송글송글한 빗방울은 창밖 풍경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엔 선명하지 않는 풍경이 더욱 어울렸다. 철커렁철커렁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베트남 맥주를 마시며 어쩐지 김광석의 목소리가 그리워 그의 노래를 들었다. 너무 웃기지 않은가. 어릴 때 이해 못했던 그 감성을 이 먼 땅에서 소환하다니.


논을 지나 높은 협곡 사이를 흐르듯 지나간다. 저 멀리 기차 앞머리가 보일 정도로 삐걱대며 구불부불한 산길을 아주 낮은 속도로 이동한다. 어느 고개를 넘었을 때인가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바다가 펼쳐진다.

우와!! 우리는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카메라를 들이댔으나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다. 에잇! 사진 따위는 포기하고 한없이 밖을 바라본다. 숨이 턱 막힐듯한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아득한 저 밑바닥에 파도가 찰랑인다. 어떻게 기찻길을 내었을까. 말이 필요 없다.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조용히 그의 노래만 흐를 뿐이다.




"그때 그냥 기차를 타고 하노이까지 갔었어야 했어!"


정말 다음이 있다면 하노이까지 12시간 기차표를 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기차도 좋았지만, 그날 기차를 기다리는 기차역 그 시간이 좋았는데."

"그 화장실 앞에서?"

"거기 화장실이 있었나?"

"맞아. 누나 거기서 일기 썼잖아."


기억은 참 이상도 하지. 원하는 기억만 기록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람마다 기억하길 원하는 것이 다르다. 같은 여행에서 말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택시에 젖은 몸을 여럿이 겨우 집어넣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은 마치 시골 버스정류장 같았는데, 누군가 군산 버스터미널이라 했다. 진짜! 그 말에 완전히 공감을 하게 되며 그 친구의 모르던 과거를 알게 되는 기분이랄까. 사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여행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비유가 좀 우습지만 단체로 연애하는 느낌.


기차는 연착되고 연착되고 또 연착이 되었다. 30분 정도 연착되는가 했더니 다시 30분 또 한 시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울 법도 한데 보채는 사람 한 명도 없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사람들은 그저 배낭을 멘 여행객뿐. 시간을 때우려고 보니 사진 찍기에 몰입하게 되는데 이제는 어플로 얼굴 바꾸는 놀이에 심취하게 되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낄낄대는 것이 아무래도 미쳐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 친구는 그 모습이 좋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미친 듯이 웃던 그때. 아무 걱정도, 아무 고민도 하지 않은 그때.


"너 참 특이하다."

"같이 여행해도 좋아하는 포인트가 이렇게 다르냐."


그 친구가 보여준 사진 속의 우린 흐트러져 있었고, 자연스러웠다. 우린 또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낄낄대고 웃는다. 오늘 이렇게 우리만 남은 것도 웃긴데, 얼떨결에 여행 뒷풀이가 되어버렸다. 낄낄낄. 비 온다. 시나브로 스며드는 이 축축함과 빗소리, 젖은 흙내가 그때의 기억을 끌어당긴다. 몸에 새겨진 그리움은 빠져나오기 힘든 늪처럼 어느 기억보다 강렬하다. 그래 이건 다 비 때문이야. 낄낄.



@2016 Danang, VITN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