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잘려 나간 손가락, 선물이 되다 2️⃣

세상 그 어떤 마취 주사보다 강력했던 그녀의 존재

by 수정

이지아와 난 타이페이에 있는 '스타 호스텔'에서 만났다. 2026.02.15


이지아는 내 가방을 든 채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토닥여 줬다. 그녀의 존재와 토닥임이 조금은 위안이 됐다. 병원에 도착한 뒤로는 그녀의 평온한 태도가 답답하거나 밉지 않았다. 이지아와 나는 응급실 의자에 앉아 의사를 기다렸다. 그녀는 자기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울음을 그친 내게 건냈다. 입 안의 사탕 크기가 점점 작아질수록 불편하고 답답한 감정도 함께 줄어드는 걸 느꼈다. 대만인 의사는 "살점과 함께 손톱도 토막이 났기 때문에 손톱이 기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스스로를 너무나 걱정하고 크게 생각하는 마음이 줄어들자 그 사실도 담담히 받아들여졌다.


사실 난 이지아처럼 이타적이고 평온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목표지향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아주 어릴 때부터 늘 나만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이루고 성취할 수 있는 것들에 온 신경을 몰두하며 살았다. 국내 최고의 명문대학을 졸업했고, 언론사와 IT 기업을 다니면서 여러 성과를 냈다. 대학생 때 한 심리 검사에선 이타성이 너무 낮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30년 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삶을 살았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나 존재들은 중요치 않았던 것 같다. 사랑이나 연결감 또한 깊이 느끼지 못 했다.


봉합을 하기 위해 수술대 같은 곳에 누웠다. 의사가 내 왼손 엄지 손가락에 마취 주사를 놨다. 마취를 했는데도 봉합을 시작하자 통증이 느껴졌다. 겁이 나고 두려웠다. 이지아는 내 오른손을 잡고 나와 눈을 맞췄다. 웃으며 다정하게 대화를 건냈다. 그녀의 존재와 그녀가 준 평온함이 세상 그 어떤 마취 주사보다도 강력하게 날 진정시키고 있었다. 불안과 공포가 눈 녹듯 사라졌다.


내 손가락이 어떻게 될지 너무나 걱정되고 이 모든 게 엄청나게 큰 일처럼 느껴졌던 것 이면엔 나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고 큰 존재라고 여기는 무의식적 전제가 깔려 있었다. 수술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던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를 떠올리니 눈물이 난다. 그녀가 주는 사랑과 연결감이 크게 확장돼 있던 나 스스로의 존재감을 녹였다. 넓은 세상 속 많은 사람들과 존재들 중 나는 극히 작은 일부였다.


이지아는 봉합이 끝난 뒤 수납하고, 서류를 발급 받고, 약을 받아 앞으로 내가 스스로 처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모든 과정에 함께하며 통역을 해주고 끝까지 내 보호자가 돼 줬다. 그녀와 함께 약국으로 걸어가는 길은 병원에 택시를 타고 올 때처럼 화창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날씨가 거슬리지 않았다. 햇살이 따뜻했고, 행복했다. 이지아가 느끼는 평온을 나도 느끼고 있었다.


수술대에 누워 그녀와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와 나의 어린 시절 가정 환경이 많이 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평생 동안 그녀가 내게 일관되게 해 준 것처럼 말보다는 행동으로, 함께 공포에 질린 것보단 묵묵한 평온함으로 돌봄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내게는 손가락이 잘리는 것처럼 큰 일이 생기면 가족들이 당사자보다 더 무서워 하고 조마조마해 하며 크나큰 반응을 보이는 게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당연한 장면이었다. 내 존재감을 무력하게 만드는 사랑과 나를 작아지게 하는 깊은 유대감은 책으로 읽거나 누군가에게 설명을 들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직접 경험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지아와 난 대만 여행을 하며 타이페이에 있는 '스타 호스텔'에 묵었다. 2026.02.15


*총 3편으로 이뤄진 대만 여행기

<대만에서 잘려나간 손가락, 선물이 되다> 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