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꿈이 있었지
두번째 회사를 나온 이유는 유학이었다.
제일 폼나게? 퇴사한 시기였고, 이어졌던 Gap year 역시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그 결정까지 가는 과정은 참 어려웠다.
사회생활을 한 지 십년이 넘어 마케팅에서 해 볼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는 생각-어처구니없는 자만이었다-이 드는데다, 회사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주위에서는 MBA 유학을 간다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났고, 그에 비교되면서 도대체 내가 왜 회사를 다녀야 하나, 더 나아가서는 내 인생은 무엇을 위해서 사나? 하는 심오한 질문에 부딪혔다.
답은 찾을 수 없고, 수렁에 빠진 사람마냥 하루하루 허우적거리며 사는데 지쳐 있을 무렵, 친한 친구가 유학을 간다고 했다. 전혀 해 보지 않았던 미술분야로 간다길래 대체 왜? 하는 의문과 함께 나라고 유학 못 갈 이유가 있어? 하는 오기같은 희망이 생겼다.
그러면서 따져보았다. 내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오직 원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 볼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그 일을 열심히 했지만 내 삶의 전환점으로 삼을 수 없을때, 다시 same old job(마케팅)으로 먹고 살 수 있게 직장을 구할 수 있는 한계 연령, 내가 가진 돈과 장단점 등등.. 그러니까 나 자신에 대한 SWOT을 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그려보고 난뒤, 완전히 손해는 아니군! 하는 판단이 들어서 나도 유학이란 것을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머리 식히러 어학연수를 가도 좋겠지만 이왕 갈거면 좀 근사해 보이는 것을 하고 오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케팅과 가까운 그러면서 나와는 먼 분야. 공연을 좋아하기도 하고, 당시 붐이 일던 공연마케팅을 공부하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해당 전공을 찾아보니 여기저기 많이 있기는 했는데, 석사 1년이라는 매력이 나를 영국으로 이끌었다. 제일 유명한 학교를 찾으니 골드스미스 대학교! 이름도 멋지다! 그래 해보자 하며 영어점수를 찾아보니 IELTS 7.0을 받아야 했다. 영어를 꾸준히 해오긴 했지만 자신은 없어서 종로에 있는 IELTS 시험준비반을 다녔고, 영국문화원 회화반도 등록했다.
그런데 영어공부를 하면서 영국과 학교와 전공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생각이 좀 변했다. 공연마케팅은 역시 마케팅이 아닌가? 마케팅과 좀 더 먼 분야, 내가 해 온 일이 전혀 아닌 분야를 하는게 머리의 회전 방향도 바꾸고, 삶에 대한 관점도 바꿀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자극은 돌아와서 다시 마케팅을 할 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공연마케팅을 하면 책을 파야한다는게 부담스럽고 공부하기 싫어서였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공연마케팅을 접고 참 부러워했고 좋아보이는 패션디자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왠 패션이냐..고 나도 생각했다.
어릴적부터 엄마가 옷을 많이 만들어주셨고, 우리집 신발장엔 90퍼센트가 엄마 구두였다. 지금도 과감하다고 하는 송치부츠, 형형색색의 소재도 다양한 하이힐들이 신발장 가득 있었는데, 다른 공부를 하자! 하고 생각을 하는 순간 엄마표 원피스들과 엄마의 신발장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선택하게 됐다. 영국에는 디자인으로 유명한 학교도 많고, 오매불망 부러워하던 런던의 공연문화라는 메리트가 합쳐져 이건 신이 내게 내린 계시가 아닌가? 하며 두번 생각 하지 않고 결정했다.
디자인으로 유학을 가려하니 어쨌거나 포트폴리오가 있어야 했다. 유학미술 학원에 등록해서 거의 1년을 꼬박 퇴근하고 그림 그리러 갔다. (학원 근처에 원빈이 출몰한다는 소리도 있었는데 난 못봤다..계는 누가 탄다고? ㅜ.ㅜ) 여름을 거쳐 가을, 겨울까지 그곳을 다니면서, 학원 첫날 구를 놓고 빛의 방향도 표현 못하던 내가 포트폴리오란 것을 만들었다. 어줍잖은 그림과 오브제들이지만 영국 학교들은 아이디어를 중요시한다는 것 하나만 믿고 어떻게 하나씩 만들다 보니 어느덧 열점 넘는 포트폴리오가 완성되었다.
한편 걱정하며 치른 IELTS는 7.5점이 나왔다. 영국문화원의 친한 강사에게 보여주니 "야, 너 옥스브릿지 갈 수 있는데, 디자인학교 갈거야?" 라고 농담을 했다. 옥스브릿지 가면 뭐하나..수업을 못따라 갈건데..하는 말이 목까지 넘어 왔지만 쿨하게 난 디자인이 더 좋아! 라고 했다.
2월 초에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순회면접 온 학교 면접관을 만났다. 내 설명과 작품을 보더니 VERY INTERESTING이라는 평가 - 딱히 잘했다는 얘기는 아님을 나중에 알았다 - 이라며 껄껄 웃었다. 된건가? 아닌가? 하고 나왔는데, 한달 후 우편함에 어드미션 페이퍼가 도착했다. 이후 등록금 내고, 기숙사 정하고, 서류 준비하다보니 봄이 왔다. 남은 것은 퇴직일자 정하는 것. 학교 시작 한달 전으로 퇴사일을 정했고, 아무도 몰랐던 유학 프로젝트를 공개하며, 퇴사 서류에 진짜로 "유학"이라고 쓰며 꽤나 뿌듯했다.
그리고 두번째 퇴사는 내 인생에 제일 잘 한 결정 몇 중의 하나임을 시간이 지나며 확실히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