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리천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리스탈 Apr 08. 2017

다섯번째 퇴사

커리어는 돈으로 설계할 수 없다

오늘자로 회사를 관두었다.

다섯번째 회사를 관두었고, 신기록이다. 2주 걸렸다.


가기 전에 내심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있었다. 갈까 말까를 백번쯤 고민했었다. 결국 가기로 결정은 했지만 딱 한가지 조건-연봉-만 맞춰 간 곳이라 오래다니기 어려울 것 같다는 불안감을 갖고 출근을 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오~래 다니지는 못해도 좀 다니며 커리어를 폼나게 끝낼만한 곳이 될까, 그렇다면 얼마나 다녀야 할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고, 또 혹시 영 아니어서 몇달 만에 그만두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여태껏 다녔던 회사는 소위 모두가 다 아는 대기업이고, 글로벌한 회사들이라-물론 내가 다닐때는 안 글로벌이었던 회사도 있다-규모와 일하는 방식, 분위기 등이 어느 정도 짐작되는 곳들이다. 마지막 회사는 대체 어떤 분위기일지 짐작도 못하겠고 그저 좀 다르겠지, 약간의 문화적 충격은 받겠지 했는데 의외로 충격이 컸다.


20년전으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 풍경, 사람들의 행동들을 보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요새도 이런 회사가 있구나! 싶은 것과 내가 여태껏 몸담았던 회사들은 어쨌거나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기업들이라 모든 것이 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연봉 하나만 믿고 온 회사를 과연 얼마나 다닐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은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단 이틀째에.


가장 놀란 부분은 아주 크지도 않은 회사에서 의전과 상명하복이 너무나 강한 것. 수직적 위계조직에는 당연히 상명하복의 문화가 있고, 우리나라의 의전문화야 신물나게 경험해 봤지만 그 작은 조직에서 더 수위가 높게 작동하는 sskk문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회식 자리에서 맞은편에 앉은 하위 직급자가 내가 마실 사이다 캔을 따서 따라주기까지 하는 행동은 감사해 하기도 웃어넘기기도 힘들었다.

물론 내가 할 일을 누군가 해 주면 편하다. 혼자 해도 될 일들이 전부 팀원들의 손을 거쳐 오니 내가 할 일은 입으로 떠드는 것 외엔 없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일부터 큰 일까지, 거의 모든 회사의 일들이 윗사람 위주로만 기획되고 실행되며, 간부급 이하의 직원들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는 것을 보니 답답함을 넘어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sskk를 재학습하게 되면 나도 머지않아 의심의 여지없이 시덥잖은 꼰대가 되겠구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사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느 때, 사람들과 식사를 하러 가서 내가 먼저 물을 따르거나 수저를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내 옆에 물병이 있으면 물을 따르고, 수저통이 있으면 수저를 놓는 일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혼내고 있다. (쓰고보니 꼰대다..) 그 이후로 늙은 응석받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지양하자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오늘 사직서를 썼다. 대표님과 인사부장이 조언을 해 달라 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과연 그들이 변화할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언젠간 그 중 하나라도 고쳐 보려는 생각을 한다면 좋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딱 한번 눈감고 해보자 한 내 실험은 실패다.

후배들, 지인들에게 절대로 돈으로 기회를 치환하지 말라는 조언을 많이 해 주었다. 지금까지 내 커리어 의사결정도 돈을 따르지 않았다. 돈은 미래 자체가 아니라 어떤 미래를 그리는데 필요한 도구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여전히 옳다는 확신을 이번 바보같은 실험으로 재확인했다.


커리어는 돈으로 설계할 수 없다.



잡스는 거의 항상 옳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케터끼리 톡톡'을 시작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