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리천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리스탈 Apr 10. 2017

네번째 퇴사

희망퇴직

직전 글인 다섯번째 퇴사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관심사는 보편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왜 퇴사 이야기에 다들 열렬한 관심을 보일까? 생각해 보니, 누구에게나 sooner or later 닥칠 일인데,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고, 그 이후의 현실이 걱정되고,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는 등, 감당하기 쉽지 않은 큰 결정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역순으로 첫번째 퇴사 이야기까지 하나씩 써서 인생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다섯번의 퇴사 중 딱 한번이 내 의지가 아닌, 회사의 결정으로 퇴사했는데, 그것이 네번째 퇴사였다.

2014년 당시 다니던 회사의 경영이 극도로 악화되어 CEO가 물러났고, 2015년 연중 희망퇴직이 한번 있었는데도 연말에 다시 대규모 희망퇴직을 받았다. 연말 희망퇴직때는 신입사원들까지 대상이 되었고,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들은 강제로 떠밀려 나갔다. 그러는 와중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비난도 받으며 기업 이미지에 상처도 크게 나는 등, 2015년 연말은 정말 혼파망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아수라장에 내던져진 인생의 하나였다.  


갑자기 그렇게 된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많이들 물어봤는데, 사실 2013년부터 조여오던 고삐는 14년을 거쳐 15년에 이르니 더 이상 벨트를 조일 수도 없을 수준이 되었다. 2012년 최종 output이 나온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뿌리내리고 확산해야 하는 본격 브랜딩 시기인데 전사 차원의 모든 경영활동들에 동결, 폐기, 연기, 이관 등의 의사결정이 내려졌고, 내가 담당하는 일 역시 철퇴를 맞고 가진 예산을 거의 삭감당하거나 아예 예산을 받지 못했다. (쓰고보니 무슨 퇴폐업소 같지만 나는 당당한 브랜드 매니저!)


하여간 나 역시 연말 정리작업에서는 살아남지 못하겠구나 하는 강한 느낌이 왔고, 다른 곳으로 이직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직급, 연차, 연봉의 3박자가 너무 잘 맞아서 쉽게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쓰나미가 오는 것을 두눈 뜨고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희망퇴직까지 남은 짧은 시간동안 마음 추스리려고 노력은 했다. 오래 회사 다녔으니 쉴 때도 됐지 라고 생각을 바꿔보고, 어차피 이제 내 일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라고 세뇌하기 시작했다. 막상 무엇을 할 지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게 그렇게나 절망스러울 수 없었지만 일단 닥쳐야 무엇이든 하리라 생각하고 기다렸다.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pink slip - 해고통지서


그리고 예상대로 마케팅과 브랜드 부서를 거의 뿌리 뽑다시피 쳐내 버리는 결정을 회사가 했다. 

희망퇴직을 받는 날 아침, 조직개편 결과가 인트라넷 게시판에 떴는데, 면 팀장되어 옆부서 팀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럴거라 예상했지만 조직개편 결과를 두 눈으로 읽고 있으니 참 속이 뒤집어 지는 것이다. 각오하던 일이 눈 앞에서 일어나면 좀 덜 힘들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고,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났다. 조직개편 공지가 뜨자마자 상무님께 가서 희망퇴직 하겠다고 말씀드렸고, 기다리셨다는 듯 ok하셨다. 너 대상자야! 라고 직접 말을 듣기 전에 먼저 사표 쓰는게 나았을텐데.  희망퇴직 공지가 뜨면 바로 신청하겠다고 상무님께 말씀드려 놓기도 했는데 조직개편을 먼저 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망신스럽고 수모스러운 상황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길로 짐을 정리해서 집으로 왔는데, 지난 시간이 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너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악마의 속삭임과 함께.


45세가 정년이라고들 많이 이야기한다. 그전에 홀로서기 준비를 하라고들 이야기를 하고.

그런데 정작 회사일에 묻혀 살다보면 대체 홀로서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짐작이 되지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경쟁력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판단이 안선다. 그저 뭘 좀 잘하긴 하지만 그걸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내 인맥으로 대체 뭘 한단 말인가 싶고, 하고싶은 일을 하라고 하지만 진짜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항상 물음표다.

나 역시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 희망퇴직이든 명예퇴직이든 내가 원하지 않는 시기에,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회사를 나오는 경험을 한 것이 과연 인생에서 얼마나 큰 약이 될지 모르겠다. 


희망퇴직을 한 뒤 벌써 15개월이 흘렀다. 여행도 다녀오고, 프로젝트도 하나 하고, 짧게 회사를 다시 다녔다가 자의로 퇴사를 하기도 했다. 여전히 헤매고 있고, 확신이 없다. 

그런데 몇 가지는 분명해졌다. 

더 이상 희망없는 일, 재미없는 일, 의미없는 일은 못하겠다는 것. 돈을 얼마를 받는가랑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시간이 더 중요하단 것.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돼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 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실마리를 얻었다는 것도 매우 큰 성과다. 

그리고 800킬로 순례길을 걸으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인 "사람들에게 기대어 산다"는 돌아와서 마주친 현실에서 더 크게 느껴졌다. 나를 기댈 수 있게 해 주는 정말 많은 친구, 지인, 가족, 또 누군가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고맙다. 


떠밀려 퇴사한 것 치고는 참 많이 얻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섯번째 퇴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