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작은 어디일까? 엄마 뱃속에서 자리 잡은 순간일까.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한 그해 겨울일까. 존재가 증명되는 몸과 영혼의 무게를 고민했다. 몸은 주어진 것이고 영혼은 이끄는 것이다. 아픔을 경험하고 나서 생각이 존재를 이끈다는 것을 이해했다. 먹고살기 위한 노력은 존재를 위함이었다. 고졸의 짧은 학력, 대출 통장 등 보이는 것에 집중하며 부족하다고 여기는 내 삶은 언제나 궁핍했고 초라했다. 가난한 이력을 인지하고 바라볼수록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돌려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야 했다. 그때야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보이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를 위함이 아닌 내 생각을 먼저 알아야 했다.
창문 위에서 찬바람 맞으며 변모하기로 결심하던 그 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항상 나를 내려놓으며 노력했는데 손에 쥔 것은 속이 텅 빈 쭉정이라는 사실에 한참 아팠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고민하며 과거의 나와 인연을 끊기로 했다.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이름을 바꾸고 지난날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겹씩 옷을 벗었다. 습관이라고 불리는 옷, 성격이라고 불리는 옷들은 몸에 착 달라붙어 벗기가 어려웠다. 오래된 스티커 물에 불려서 떼어내듯 시간의 여유를 두었다.
유튜브를 듣기 시작했다. 유명한 강사들의 무료 강의는 몇 번의 터치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른 새벽 일어나서 독서를 시작했다.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원하는 미래를 상상했고 아픔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과거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렸다.
나에게는 어떤 일에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야가 있었다. 음식이 짜게 되면 조금씩 먹으면 되고, 모양이 예쁘지 않아도 마음을 바라봤다. 이런 생각을 나누면 어른들은 말장난이라고 했다. “정성을 들여야지.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돼.” 노력하고 싶지 않은 핑계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아무 말 못 했다. 어쩌면 사실인지도 모른다. 음식이 어려운 나는 그렇게라도 포장하고 싶었다. 후회와 반성은 자책임에도 잘못했다고 말해야 어른들은 말을 멈추고 고개 끄덕여주었다. 잘 못하는 나에 대한 질타가 쌓이면서 타인의 시선에 집중하며 나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옷을 벗으면서 알았다. 겉모습은 바꿀 수 있지만 속은 바꿀 수 없었다. 새로운 나를 찾으려 노력하는데 애써 눌러놓았던 시선이 다시 살아났다. '모두 잘해야 하나?', '못하는 건 마음이 아니라 재능이 없어서 인데' 억울한 마음이 올라오면서 그간 타인의 시선에 맞추려 애쓴 내가 안타깝고 불쌍했다. 애씀은 가벼움이 아니니까. 내 무거운 마음을 나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행동을 바꾸기 위해 대화를 멈추고 사람들과 거리 둘수록 남들이 이상하다고 말했던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냥 살라!"는 사람들 틈에서 무엇이 맞는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문제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믿기로 했다.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도전은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남들이 쉽게 얘기하는 '엉뚱함'이 아니라 '남다름'이었다. 내가 아팠던 이유는 타인과 상관없이 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아서였다. 내 생각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타인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다시 시선을 바꾸자 상황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왜 이럴까!’가 아니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로 생각이 바뀌었다.
새로운 출발점은 해고였다. 미래의 막막함과 창피함이 교차하는 순간 비로소 살아야 하는 이유를 고민했다. 당시의 나는 아이들을 위해 올인하지 않았고, 나를 위해 열심히 살지도 않았다. 항상 허덕이며 버스 뒤꽁무니 쫓아가는 듯한 삶을 살았다. 언제나 고민과 걱정으로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온통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오르는 나날이었다. 절벽 끝까지 스스로를 내몬 뒤에야 시선이 바뀌었다.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내 시선으로.
호흡곤란을 경험하며 걱정과 불안은 사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 창문에서 뛰어내렸다면 나 없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고민하자 현재에 집중해야 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할 때 떠오른 사람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었다. 어쩌면 엄마라는 두 글자가 주는 힘이라기보다는 세상과 헤어지기 싫어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혼자 걷기 어려울 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했고, 그 시선의 주인공을 아이들로 정했다. 응원해 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모습은 보여도 포기하지는 않을게!' 혼자 다짐한 뒤 지켜봐 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며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고통을 승화시켜 메시지를 만들어서 전달하는 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