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를 믿지 못하는데. 내가 불안해?”
“너를 못 믿었으면 죽였지!”
남편의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나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도. 그러나 때론 상대방의 진심보다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내 욕심을 위해서 말꼬리를 물고 싶을 때가 있다.
회사를 그만둔 뒤 나는 방황했다. 남편의 모든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든 내 머릿속에는 내 행동을 모두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따뜻한 마음은 집착이었고, 관심은 참견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투명인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 앞길 찾기도 버거울 때였다.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 대신 궁색이 자리했다. 다시 돈을 벌고 싶었다. 아니 벌어야 했다. 당시 매일 만나는 자기 계발서는 원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나도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하며 시선을 넓혔다. 그리고 운명처럼 화장품 사업이 다가왔다. 관계를 어려워하던 나는 절대로 영업은 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극복하고 싶었다. 나도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단전 깊숙이 억지로 욱여넣었다. 아이들 뒷바라지해야 하는데 남편의 일은 여전히 드문드물었다. 한 달에 보름 이상을 집에 있으니 평일에도 한 공간에서 24시간 같이 숨 쉬는 일상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지루했다.
뒤늦게 공부한다면서 돌아다니는 내가 그의 눈에는 정신에 바람 든 여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가고 들어오는 순간마다 소파에 앉아서 위아래로 훑는 시선의 뾰족함이 구석구석 따라왔다. 올가미였다. 답답한 심정 내뱉은 "못 믿냐"는 내 질문에 남편은 숨도 쉬지 않고 "죽음"을 툭 던졌다. 어이없는 말을 한참 곱씹었다. 어떻게 죽인다는 말이 저렇게 쉽게 나올까. 내 행동이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
남편의 말을 붙잡았다. 혼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바람이 불 때 그의 말은 가슴속 일렁이는 바다에 강한 파도를 일으켰다. 밤새도록 방파제를 때리는 철썩철썩 파도 소리에 뒤척이다 다음 날 밤 해일을 일으켰다.
“나 시간이 필요해. 우리 생각할 시간을 갖자.”
“뭐?”
“나를 죽일지 모르는 데 같이 있기 힘들어. 차 키 줘. 일주일만 생각하고 올게.”
"지금 나가면 가출이고 이혼이야."
무섭지 않았다. 어차피 여행 다녀와서도 마음 정리안되면 이혼할 마음이었다.
남편은 성난 황소처럼 가슴을 들썩이며 콧김을 내뿜더니 침대 위로 키를 던지고 문을 쾅 닫으며 거실로 나갔다. 과거의 나라면 이 상황에 눈물이 터졌겠지만, 이상하게 감사하다는 말이 불쑥 올라왔다.
다음 날 새벽 짐을 꾸렸다. 여름이라 옷은 부피가 작았다. 대신 매일 새벽 해야 하는 필사와 인증들 덕분에 노트북과 책이 캐리어 한쪽을 가득 채웠다. 여행 가서도 루틴을 지켜야 당당할 것 같았다. 덩치 큰 가방을 들고 내려오는 데 누가 보면 집 나가는 사람처럼 보일까 두려워 서둘렀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트렁크에 짐을 싣고 운전석에 앉았다.
충청부터 부산까지 계획은 다 세웠다. 심호흡한 뒤 시동을 걸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남의 음식 훔쳐먹는 사람처럼 죄지은 느낌도 들었다. ‘멈출까?’ 머리를 흔들었다. 다시 들어간다면 그의 따가운 시선과 말 습관은 더 심해질 것이다. 용기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함부로 대할 것 같아 과감하게 핸들을 꺾었다.
출근 시간이 지났건만 정체가 심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도로 위에서 심호흡했다. 언젠가는 뚫리겠지라는 마음으로 커피 한 모금 마시자 앞차가 속도를 냈다. 액셀을 밟았다.
‘삐비비비빅~~~’
차의 요란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터널을 진입하는 순간 시야가 흐려 정차된 차를 보지 못했다. 조수석에 놓아둔 가방과 커피가 굴러 바닥으로 떨어지며 몸이 앞으로 심하게 쏠렸다가 반동했다. 겨우 멈추었는 줄 알았다.
쿵!
'사고를 냈구나.'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앞에는 차가 없었다. 후방 추돌사고였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생전 처음 사고를 당했다.
우리 차만 찌그러지고 심한 부상은 없었다. 보험사와 통화 후 톨게이트로 향했다. 꽉 막힌 터널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비상등을 켜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사고 앞에서 침착한 내가 대견했다.
사고 처리는 안산에서 해도 되고 현장에서도 가능하다는 설명을 듣고 남편에게 전화 걸었다. 자기 물건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이 뭐라고 하려나 걱정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몸보다 남편 눈치를 먼저 보는 나였다.
“교통사고 났어.”
“다~ 너 알아서 해.”
걱정을 바랐는데 한숨만 들렸다. 사고 소식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역시. 잠시 여행을 포기할까 고민했는데 남편의 한숨에 정신 차렸다. ‘가보자!’ 현장에서 사고 처리 후 렌터카를 받았다. 한 번도 운전해보지 않은 고급 승용차 키를 손에 쥐고 목적지를 입력했다.
다시 출발한 뒤 어디를 가나 막힘이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약 한 시간 동안 벌어진 많은 일을 떠올렸다. 터널을 진입할 때 시야가 적응하지 못해 일으킨 내 실수. 정신보다 먼저 반응해 준 몸. 다행이었다. 브레이크를 조금이라도 늦게 밟았다면 더 큰일이 벌어졌을 텐데.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친절하지 않아서 나는 이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의 불친절이 득이 되었구나. 지금 이 상황은 모두 남편 덕분이라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나를 가장 많이 흔드는 사람은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내 성격이 가장 문제일지도. 눈치 보며 자신을 낮추는 저자세로 언제나 빌미를 주었다. 정면을 응시하며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려움으로 가득하던 내가 사고 처리에 침착하다니. 그간 공부한 시간과 노력이 내 삶의 형질을 단단하게 바꾸었구나. 생각부터 정리하고 난 뒤의 행동은 차분했다. 앞으로도 차분하게 생각하고 나아가면 흔들리지 않겠지.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어긋난 과거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