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다미 Jun 20. 2024

사랑으로 데워진 초라함

엄마의 사랑

한발 물러서서 과거를 바라보는 시간이 깊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나는 언제나 초라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가난한 삶은 외모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결혼 직후 친구들은 원피스에 높은 부츠를 신는데 나는 조카가 작아서 못 신는 운동화도 감사해하며 받았다. 어두운 지하만큼이나 칙칙한 회색을 즐겨 입었다. 언제나 싼 물건만 고집할 그때 궁색이 온몸에 찌들어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친정엄마에게 받는 것이 점점 익숙해졌다. 잘 살면 베풀겠다면서 보답은 백 년 만기 적금처럼 뒤로 미루며 철면피가 되어갔다.

     

처음부터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았다. 기숙사 생활하며 결혼 자금을 충분히 모았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 퇴사하면서도 퇴직금은 부모님께 드렸다. 5년 동안의 결실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부쳤다. 그것이 내 마지막 효도였다.     


남편은 대기업 취직 후 입사를 앞두고 IMF를 만났다. 회사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고 입사 취소 통보를 받은 이후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다 우리 만남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의 자상함이 좋아서 경제력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벤치에 손수건을 깔아주고, 병뚜껑을 따주는 세심함. 비록 장손이지만 여자의 힘듦을 알기에 짐을 안 지어주겠다는 얘기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내 편이 되겠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었다.     


오랜 연애 뒤 결혼했고 처음으로 알게 된 남편의 월급은 초라했다. 도저히 두 사람을 책임질 수 없는 월급으로 시이모 건물 반지하에서 맞벌이로 시작했다. 큰아이 임신 후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고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비상금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그마저도 조금 더 넓은 옆방으로 옮기며 내 손을 떠났다.     


몇 달 뒤 남편은 전혀 다른 분야로 직장을 옮겨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일 년도 다니지 못하고 디스크 수술을 했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회복하는 동안 수입이 없어 직장을 다니기 위해 고민하는데 남편은 내 취업을 극구 반대했다. 친척에게 구박받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먹거리며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고집에 대책 없었다. 3살짜리 딸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심정만 복잡했다. 어디에도 얘기할 수 없는 답답함이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이모는 나에게 과일 가게를 권유했다. 가게 자리까지 봐주면서 도와주겠다는 말씀을 거절했다. 돈도 없고, 과일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데 무슨 장사를 하라는 말인지. 게다가 유동인구도 없는 곳에서. 2년 뒤 입주하는 아파트를 보고 시작하는 장사는 잘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게 내 눈에는 보였다. 못하겠다는 거절에 시이모는 도매업자까지 소개해 주었지만 나는 절대 못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거절을 게으름이라고 생각했는지 시댁의 눈초리는 따가웠다. 남편은 한마디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서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지켜보던 시동생은 안쓰러웠는지 보증금을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호의가 압박이 되었다. 더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억지로 등 떠밀리듯 시작한 장사지만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린 딸을 데리고 아침 8시부터 문을 열었다. 온종일 고개 쳐들고 있어도 지나가는 사람은 50여 명. 장사가 될 수 없는 가게를 아침 일찍 오픈하고 종일 과일을 만지작거렸다. 성한 것은 바구니에 올리고 상처 난 과일은 곧바로 딸 입으로 직행했다. 너라도 실컷 먹어 다행이라며.     


결국, 몇 개월 버티지 못했다. 첫 달부터 월세를 밀리는,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처음부터 정해진 답에 책임은 또 나에게로 왔다. 문 닫기 직전 준비 없이 둘째까지 덜컥 임신한 뒤 “여자가 그런 것도 모르느냐”라는 시아버지의 말씀은 시어머니를 통해 내 귀에 들어왔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도 그 누구에게도 말할 곳이 없었다. 마음 아파도, 힘들어도, 내가 선택한 결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그런데 이상하게 힘들어 말을 삼킬 때 엄마가 보낸 택배가 평소보다 더 자주 왔다.     


딸 과자 한 봉지 사주고 싶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천 원이 없는 날. 기대감이 잔뜩 담긴 눈을 바라보며 미안함을 전하자 딸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양팔 벌리고 빙글빙글 돌며 내게 말했다.

“엄마, 나는 이렇게 춤출 수 있는 우리 집이 있어서 너무 좋아.”

3살짜리 입에서 나오는 말에 가슴이 먹먹했다.     


며칠 후 전화가 울렸다. 택배 보냈다며 딸 양말도 챙겼다는 엄마의 전화. 가게를 접은 뒤 보고 싶다는 엄마에게 기름값 받고 달려가 얼굴을 보여드린 뒤였다. 딸 양말을 빠트리고 왔는데 양말 핑계 삼아 택배를 꾸리셨나 보다. 특별한 일 없이는 전화 걸지 않는 엄마에게 다음 날 또 전화가 왔다.

“택배 받았냐?”

“아직”

“택배 오면 양말부터 봐라.”

“네. 택배 받고 전화드릴게요.”

몇 시간 뒤 무거운 상자가 도착했다. 10킬로짜리 과일 상자에 무엇이 담겼는지 기사님은 낑낑대며 반지하 계단을 내려오셨다. 겨우 집에 들여놓고 전화 걸었다.


“양말 봤냐?”

“아직 안 열어봤어요.”

“지금 열어 봐라.”

양말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잠시만 기다리라며 택배를 열었다. 안 보인다는 말에 봉지를 들어보라고 하셨다. 안쪽 깊숙이 넣어진 양말을 확인한 뒤 있다고 말씀드리자 알았다며 전화를 끊으셨고 나는 도톰한 양말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택배 상자에 담긴 딸 양말에는 만 원짜리 열 장이 구겨져 들어있었다.      


눈물을 삼키며 남편이 좋아하는 깻잎 장아찌와 쥐포, 참기름 등 밑반찬과 양념을 한참 정리했다. 엄마 정성으로 잘 차려진 집밥을 먹은 속이 든든한 날, 무언인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지탱하는 날 비로소 마음의 허기가 채워졌다. 초라하게 움츠러든 내 마음은 사랑이라는 옷을 입어 따뜻하게 데워졌다.

이전 15화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선택 '고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