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햇볕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고추잠자리가 바닥에 콩콩 발 도장을 찍는 여름. 등 뒤로는 호랑이가 눈을 부라리고 앞으로는 아지랑이가 이글거린다.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꼬마는 따가움을 느꼈다. 등 뒤에는 입을 쩍 벌리고 두 눈에 힘을 준 호랑이 액자가 있다.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이 무서워서 마루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슴이 쪼그라들었는지 다리를 들어 올려 공간 하나 없이 가슴에 딱 붙이고 앉았다. 무릎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압박하자 조금 안정되는 듯했다.
글썽거리는 두 눈 아래로 앙다문 입이 씰룩거린다. 가끔씩 들썩이는 등짝과 벌렁거리는 코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말을 해본 적이 오래인 듯 아이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등은 한없이 초라하고 무릎을 붙잡은 손에는 땟물이 줄줄 흐른다. 일으켜서 씻겨주고 싶지만, 옆에 조용히 앉았다. 그저 조용히. 침묵만 흐른다. 아이는 무슨 이유로 잔뜩 겁을 먹었을까.
타임캡슐로 상처를 풀어낸 뒤 매일 새벽 과거의 나를 만나는 여행을 했다. 부정적인 생각의 뿌리는 어디였는지. 학창 시절 나는 어떤 아이였는지 들여다보다가 기억이 사라짐을 알았다. 기억의 절벽, 어린 시절 몇 년의 기억이 없었다. 기억상실이다. 아무리 생각을 돌려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몇 날 며칠을 애쓴 끝에 내 어린아이를 가까스로 만났다. 그동안 외로움에 사무친 이유를 풀어줄 수 있는 아이 키맨이다.
어렵게 만난 아이는 나를 보지 못했다. 자기 슬픔에 빠져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내가 보일 텐데. 아쉬웠지만 아이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아이의 등을 살살 문질러준 뒤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하는 동안에도 한여름 뙤약볕을 바라보며 침울해 있을 아이가 마음 쓰였다. 컴컴한 새벽이면 홀로 거실에 앉아 찾아가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되었을까. 드디어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모두 알았다. 왜 그리 슬퍼 보였는지.
1남 6녀의 늦둥이인 나는 태어나자마자 언니들 손에 맡겨졌다. 가난한 살림에 가족은 많아서 부모님은 늘 바빴다. 간간이 엄마의 손길을 느끼긴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엄마의 시선은 대부분 외아들에게 향했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오빠. 그래도 괜찮았다. 나에겐 언니들이 있었다. 언니들은 막냇동생을 업어주고 이불에 태워 흔들어주며 지치지 않고 나랑 놀아주었다. "까르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행복한 유년 시절 가장 무서운 것은 집이었다. 꼭대기에 자리한 집 뒤로는 작은 절과 낮은 산 같은 언덕이 있었다. 어느 날 새벽, 풍경 소리에 잠을 깨서 마당에 나왔을 때 어둠이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쫓아오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라며 방으로 뛰어 들어가다 엄마 머리카락을 밟았다. “호랭이가 물어갈 년”
엄마는 잠결에 무심히 욕을 뱉으셨다. '방금 쫓아오는 것이 호랑이였구나.' 그날부터 어둠은 공포로 다가왔다. 다행히 여덟 살에 아랫동네로 이사했다. 신작로도 가깝고 마당도 넓은 집이다. 언니들과 잘 수 있는 넓은 방에서 깡충거리며 즐거워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어느 날 고개 들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언니들이 언제 떠났는지 기억도 없다. 당시 고등학교도 없는 그곳에선 중학교 졸업하고 객지로 떠나야 했다. 우린 작별인사를 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는 혼자가 되었고 부모님은 여전히 바쁘셨다. 갑자기 혼자가 된 내 사정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맞이한 여덟 살의 여름 방학이다. 부모님은 이른 새벽에 들로 나가셨고 텅 빈 집에 무서운 호랑이와 나만 남겨졌다. 두려움과 외로움은 그렇게 서서히 깊숙이 스몄다.
그동안 눈치 보며 살았던 이유는 누구든지 갑자기 떠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구나.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의 원인을 알았다. 외로움을 잊거나 달래기 위해 나만의 엉뚱함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바람이나 생각 등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이 생겼다는 사실도 서서히 이해되었다.
헛헛한 감정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타임캡슐처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단어가 없을까 고민하면서 만난 단어는 ‘고독’이었다. 책 읽고 강의 들을 때마다 고독을 삼키라는 말을 자주 접했다. 내 외로움도 고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 단어의 의미 차이가 궁금하다.
외로움은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고, 고독감은 외로움을 느끼는 마음이다.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고독일까. 그동안 밀어내려고 해서 힘들었는데. 이제 외로움을 받아들여 고독한 사람 되기로 했다. 받아들임은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