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자전거를 즐길 때였다. 휴일이면 언제나 산을 타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감정을 달랬다. 맞바람을 온몸으로 막고 앞으로 달릴 때면 세상에 맞서는 힘이 느껴졌고, 뒷바람으로 속도가 날 때는 세상의 응원을 받는 듯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해 답답한 가슴이 바람으로 뚫렸다. 달리는 순간마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산에서는 인생의 쓴맛까지도 달게 소화되는 듯했다.
자전거로 언덕을 오르는 일은 고행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언덕을 오르며 일상의 고민을 떠올리기도 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를 되새기기도 했다. 아이들이 사춘기 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킬 때는 ‘이 돌 하나 넘으면 문제가 풀릴까’하는 기대를 품으며 올랐다.
언덕을 오를 때 시선이 중요하다. 땅만 바라보면 위험하고 고개를 너무 들면 쉽게 지친다. 팔을 뻗은 뒤 상체를 약간 세우고 전방을 주시한 채로 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자전거 타기는 사는 것과 비슷하다. 시야가 갇혀서도 안 되지만, 머나먼 뜬구름만 올려봐도 위험하다. 시선과 생각이 유연해야 한다. 남들보다 잘 타는 나만의 비법은 유연함이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이제 시작이다’라는 주문을 외며 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한두 시간을 탔어도 늘 시작하는 마음으로 달렸다.
내리막길은 보상이다. 시원하게 내달리고 싶은 마음을 상체에 싣는다. 프레임 각도에 맞춰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든다. 엉덩이는 뒤로 쭉 빼야 안전하다. 오르막길 오를 때와는 정반대 자세이다. 내리막길에서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상체를 세우면 속도도 나지 않을뿐더러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 체력 소모가 많아진다. 특히 돌길에서 엉덩이를 들지 않으면 허리에 무리가 많이 간다. 반드시 엉덩이를 들고 상체를 숙여줘야 안전하다. 안정적인 자세가 보기에도 가장 멋있다.
산악자전거 탈 때는 등산객을 언제 만날지 몰라 조심해야 한다. 도로에서 보행자가 우선인 것처럼 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력이 있는 자전거를 끄는 사람은 산악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신의 안전과 등산객의 안전까지 고려해야 하는,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되는 스포츠이다.
등산객들은 삼삼오오 나란히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혼자 걷는 걸으면 이어폰을 끼는 경우가 종종 있어 뒤에서 달려오는 자전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주 오는 등산객은 눈빛을 보며 서로를 피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가는 등산객을 만날 때는 신호를 줘야 한다.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입문했을 때는 등산객을 만나면 속도를 줄이고 늘 죄송하다는 인사부터 했다. 응원하며 기꺼이 비켜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불편하게 보는 시선도 느꼈다. 정중하게 인사했는데 불편해하는 이들을 만날 때면 왠지 모르는 찜찜함이 있었다. 그러나 늘 더 조심할 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삶을 바꾼다며 세상과 거리 두던 어느 날 오랜만에 자전거에 올랐다. 몇 달 만에 타는 자전거 위에서 기분이 새로웠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향한 수리산에는 이른 아침이지만 등산객이 많았다. 늘 하던 대로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며 앞서는 순간 내 언어가 불편했다. 미국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관한 내용을 읽은 뒤라서 그랬는지 모른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점이 느껴졌다. 외국 사람들은 ‘땡큐’를 많이 사용하고 우리는 ‘죄송하다’를 많이 사용한다. 죄송하다는 잘못했을 때 사용하는 언어인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순간에도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먼저 지나가려는 마음은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지나가겠습니다.”
다음 등산객에겐 조금 바꿔 말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등산객들은 흔쾌히 비켜주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한참을 달리면서 다른 인사법이 생각났다.
“지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등산객의 표정도 바뀌었다.
'감사하다'는 말은 베풀었을 때 받는 인사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 '이타심'이 있다. 감사 인사는 도와줬다는 기분을 들게 해 준다. 감사합니다를 사용한 뒤 내 기분도 다름을 느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생각이 바뀌는 것, 이것이 '언어의 힘' 아닐까.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의 차이를 바라본 뒤 작은 언어에 더 집중했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하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맞바람처럼 애쓰던 삶이 작은 생각의 전환을 통해 가벼운 뒷바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