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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다미 Jul 25. 2024

고집 센 아이

나는 고집이 있다. 고집 없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모두 자기 생각과 의견으로 살아간다. 내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인데 고집 세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고집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고집이 없다면 거절도 하지 못할 것이다. 거절하지 못한 사람은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데, 고집 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듣기 싫은 그 단어를 나도 사용하고 있었다.     


아들은 많이 늦었다. 9개월 만에 걷기 시작한 딸과 다르게 돌이 지나도 걷지 못했다. 양손을 잡아주면 조금씩 걸었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걱정할 만큼 늦은 시기는 아니었지만, 딸의 빠른 발육과 비교되어 불안한 마음도 많았다.      


다행히 14개월에 첫걸음을 뗀 후 아주 잘 걸었다. 그동안 걷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한 발을 떼기 시작한 뒤로는 넘어지지도 않고 걸었다.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서 잘 걸어 다니자 신발 신겨 연습시킨 뒤 밖으로 나갔는데 인도 위에 세우니 걷지 못했다. 이후로도 밖에만 나가면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도통 걸을 생각 없이 두 팔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여워 웃으며 안아줬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말해도 꿈쩍하지 않는 아들의 고집을 꺾어야 했다.      


“자, 이제 혼자 걸어볼까?”

따뜻한 가을날 외출하고 오는 길 인도에 세우며 혼자 걸으라고 했다. 역시 예상한 대로 두 팔 벌리고 꿈쩍하지 않았다. 한 손을 잡고 이끌어도 두 발이 땅바닥에 딱 붙었다. 고집을 꺾으려는 엄마의 의지를 모르는 듯했다. 안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걸어야 한다고 말해도 움직이지 않자 나 혼자 몇 발 걸어갔다. 아들은 엉엉 우는 소리에도 독하게 마음먹고 꼼짝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봐도 흔들리지 않고 버틴 뒤에야 겨우 몇 발 떼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한 손을 내밀었고, 아들은 다시 두 팔을 벌렸다. 마치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했다. 한 손은 잡을 마음이 없는 아들을 무시하고 몇 발 더 걸어 나가고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5분이면 될 거리를 30분 동안 지체한 끝에 걷기 시작했다. 기어코 아들의 고집을 꺾은 셈이었다.      


고집 세다는 말은 언제 사용할까?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은 아이들에게 그리고 상대의 힘을 누르고 싶을 때이다. 나에게 고집 세다고 말한 사람들은 대부분 윗사람이었고 나도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사용했다.     


아들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중이염이 걸려 두 돌이 다되도록 매일 항생제를 먹었다. 의사의 말로는 아들에게 소리는 고산지대에 올랐을 때처럼 먹먹하게 다가오거나, 물속에 있을 때처럼 멍해지는 상태로 들린다고 했다. 고집이 아니었다. 거리의 소음이 얼마나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을까? 두 팔을 벌려 나를 애타게 바라보던 아이의 모습은 고집보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지도. 그런 아들을 고집 세다고 단정 짓고 길거리에서 울리다니 모진 엄마였다.      


아들이 걷기 시작한 뒤에는 젖 떼는 방법을 고민했다. 딸과 아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모유 수유를 끊었다. 어려운 형편으로 영양식을 잘 챙겨주지 못해 사랑이라도 듬뿍 주고 싶어 오래 안아주었다. 하지만 둘을 키우는 방식은 달랐다. 딸을 키울 때 뭐든 강제였다. 기저귀는 돌 무렵이면 떼야하는 줄 알고 팬티부터 입혔고, 젖도 어른들 말씀만 듣고 약을 발랐다. 쓴 가루약을 묻힌 뒤 맛을 본 아이는 놀라서 찾지 않았다. 아이가 찾지 않는 곁이 가벼우면서도 허전함을 느끼며 성급한 행동을 후회했다. 그때의 아쉬움이 아들에게는 늦어도 괜찮다는 인내심을 주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눈 맞추고 말했다. 얼굴 마주 보고 또박또박 말하면서 알아듣기를 기도하면서.      


“엄마 찌찌는 일주일만 더 먹고 밥 먹자!”

젖을 뗄 때는 치아가 있는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고 얘기하며 일주일 뒤에는 수유를 멈춰야 한다고 했다.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해줬다. 그날 이후 품을 더 깊이 파고들며 딱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며칠 남았는지 차분히 설명했다. “이제 내일이면 그만 먹어야 하는 거 알지?” 마지막 날 밤 깊이 파고드는 아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은 뒤 신기하게도 나를 찾지 않았다. 잘 듣지 못해도 척척 이해하다니. 이후 아들에게 설명하는 습관이 생겼다. 미리 말해주기를 해주면 순순히 잘 따라줘서 기특하고 고마웠다.     


오래 괴롭혀온 중이염은 안산으로 이사 온 뒤 3일 만에 나았다. 백일 전부터 먹은 항생제를 22개월이 되어서 끊었다. 그러나 말문은 트이지 않아 걱정이 쌓이는 시기에 어린이집 보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소개받은 어린이집은 무료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자리도 있었다. 하루만 맡겨보라는 말을 듣고 생각 없이 바로 승낙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는지 안 떨어지려는 아이를 억지로 떠맡기듯 안기고 뒤돌았다. 다 그렇게 떼어 놓는다는 말을 믿었다. 아들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울어댔지만 안 보이면 울음을 멈출 거라 생각하면서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약속시간이 되어 데리러 갔을 때 퉁퉁 부어있는 두 눈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제 계속 다녀야 한다고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다 그렇게 떼어 놓는다"라는 얘기가 힘을 주게 했다. 이해하지 못한 아들은 몇 달 동안 몸을 뒤집고 세상 떠나가라 통곡하며 마지못해 등원했다. 몇 달간 등원 거부권을 행사하더니, 말이 트이기 시작하자 어린이집에 재미가 들렀는지 순순히 가기 시작했다.      


“아이랑 한 시간만 먼저 놀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듬해 누나와 같은 곳으로 보내기로 마음먹고 그간의 사정을 말한 뒤 원장님께 부탁드렸다. 안전한 곳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준비해 간 풍선에 바람을 넣어 풍선 잡기 놀이를 하며 교실 구석구석에 발자국을 새기고 공간에 웃음을 담았다. 아들은 그날 이후 낯선 곳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몸이 아프면 치료받아야 나을 수 있어. 무서워서 참으면 어떻게 될까?”

“더 많이 아파.”

“그럼 우리 늦기 전에 의사 선생님 만나 볼까?”

미리 설명해 준 뒤 이해한 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병원을 혼자 다녔다. 어른도 무서워하는 치과도 혼자 가는 아이를 보며 눈을 마주 보며 설명해 주는 일이 아이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느꼈다.     


돌이켜 보니 딸에게는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은 채, 알아서 커 주기를 바랐다. 동생 기저귀 챙기는 세심한 마음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성숙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수였다. 어린이집 등원할 때도 “차가 올 시간이 되었다”라고 차분히 얘기했다면 좋았을 텐데 “시간 없어! 밥 빨리 먹어”라고만 말하니 명령어가 되었다. 급한 마음이 말에 얹혔으니 조급해져 다그치기 일쑤였다.      


강압적으로 자란 딸의 사춘기는 혹독했다. 말이 안 통한다며 대화를 거부했고 관심이 필요할 때는 자주 아팠다. 아프다고 하는 말에는 안아달라는 마음이 들어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 꽉 막힌 답답한 고속도로 같았다. 반대로 아들은 사춘기가 되어도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딸의 사춘기를 뒤늦게 이해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아픔을 겪은 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문이 열렸다. 어른은 말로 가르치려 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딸에게도 설명하는 습관이 있었다면 훨씬 쉬운 사춘기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사춘기는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과정인 듯하다. 강요하지 않고 의견을 얼마나 들어주었는지. 생각을 주입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 주었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이제야 깨닫는다. 고집 없는 사람은 없다. 고집을 누르려는 내 마음이 고집 센 아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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