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꾸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도구는 언어였다. 습관처럼 내뱉는 언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많음을 느꼈다. 그중 가장 불편한 언어는 ‘아니에요’이다. 운동화 속 작은 돌멩이처럼 귓가에 걸렸다.
나는 외모도 맵시도 ‘예쁘다’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행색만 봐도 집안 경제를 예상할 수 있게 다녔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가 예쁘다고 말하면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답했다. 듣기 좋게 말한다고 생각하며 겉으론 부정했던 언어들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은 말을 해준 이에게 "고맙다"라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왜일까. 아마 겸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에요’는 배운 단어이다. 용돈이 없던 어린 시절 명절을 애타게 기다렸다. 명절 아침이면 대문 밖으로 고개 쏙 내밀고 친척 어른들을 기다리다 웅성웅성 소리가 들리면 기다리는 마음 들키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방으로 들어가 숨죽였다.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나서는 어른들이 부르시는 소리에 쭈뼛쭈뼛 나가면 세종대왕님이 눈앞에 계셨다. 얼른 받고 싶지만 단번에 받으면 예의 없다고 하니 “아니에요”라고 거절부터 했다. 다시 받으라는 얘기를 듣고 부모님의 “받아라”라는 허락이 떨어지면 받는 순서. 얼마나 시간 낭비였는지 모른다. 속마음 숨기고 거절하는 심정은 조마조마했다. 손사래 치면서 눈은 돈에 콱 박혀 있는 내 모습은 얼마나 웃겼을까.
배운 언어는 절임 음식처럼 깊숙이 스며들어 아이에게도 학습시키고 있었다. 딸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말귀를 알아듣고 행동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예쁜 모습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었다. 돌 무렵 어른들과 함께 있을 때 딸기를 손에 쥐여주며 입으로 향하는 딸의 손을 붙잡고 어른부터 드리라고 했다. 어른들은 아이 먹이라고 하지만 아이가 드리면 기분 좋아하셨고 나도 딸의 재롱을 보면서 흐뭇했다. 만약 어른들이 거절하시면 다시 드리라고 말하며 아기 때부터 두 번은 권해야 하는 것을 가르쳤다. 말이 트이면서는 어른들의 “너 먹어라”라는 말씀에 언제나 “아니에요. 먼저 드세요.”라고 답하도록 했다.
몇 달 전 우연히 입사 제안을 받았다. 직장졸업을 선언하고 자립을 노력했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느낄 때였다. 원하는 미래와 일치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왕복 4시간 거리임에도 단번에 승낙했다.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분들과 어떤 대화가 이어질지 설렘을 느끼며 사람을 만나고 있다. 어느 날 가볍게 흘린 내 말이 계속 생각난다며 수강생 중 한 분이 전화를 해왔다.
“우리 딸이 아프다고 할 때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났어요.”
60대 여성은 가난, 가족 불화, 사기 등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아픔들을 이야기하며 해맑게 웃었다. 역경을 이겨냈다는 힘 있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고통이 미소가 될 때까지 수많은 문을 통과했을 테다. 미안함의 문, 분노의 문, 자책의 문. 고통이 누군가에게 닿은 뒤 희망을 주려면 승화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아픔을 늘어놓기만 하면 신세 한탄이다. 미소로 만든 그녀의 이야기는 듣는 나도 즐겁게 해 주었다. 얼마나 힘든 고통을 경험했을지도 족히 짐작되었다. 자신의 잘못을 찾고 고뇌하면서 과거를 재해석하는 시선이 쌓였을 것이다.
좌절을 이겨내는 힘은 용기이다. 산을 오르기 위해선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안전한 신발을 신어야 하듯이 일상의 작은 상처, 큰 부상이어도 낫기까지는 기다림과 인내라는 약은 필수이다. 낮은 산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슬리퍼 신고 오르면 위험하듯 어떤 아픔이든지 이겨내려는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육체적인 고통도 감내해야 하기에 정신이 꼿꼿이 버텨줘야 한다.
대화 나눈 분의 과거는 작은 산 하나가 아니라 마치 태백산맥 종주를 한 듯했다. 끝도 없는 길고 긴 여정. 그 안에서 만들어낸 통찰력이 멋있었다.
“멋지세요”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칭찬에 당연하게 아니라고 하는 답이 걸렸다. 고난을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아니에요’라고 답하며 자신을 낮춘다. 상처의 크기를 숨기고 노력을 작게 만든다.
‘받아 주시면 어떨까요.’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기분 좋게 하는 말에 누군가 아니라고 답하면 멋쩍어진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행복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아이가 ‘네’라고 답하며 잘 받아줘서이다. ‘싫어’라고 답할 때 부모는 답답해진다. 물론 아니라는 말이 내 언어를 부정하는 뜻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감사합니다.’ 또는 ‘노력했어요.’라는 답을 듣고 싶었다. 긍정의 답은 자신의 노력을 인정함과 동시에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시선도 존중해 준다고 느끼기에.
절임 음식처럼 깊숙이 베인 ‘아니에요’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다. 대답하고 나서야 알아차린다. 아마도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지만 짠지를 싱겁게 만들려면 물에 한참을 담가 놓아야 하듯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
‘기가 막힌다’라는 말이 있다. 기는 에너지이다. 기가 막힌다는 건 소통이 되지 않아 에너지의 흐름이 차단되었다는 의미이다. 기가 원활하게 흘러야 일이 잘 풀린다. 내 아니라는 언어가 누군가의 에너지를 흐르게 할 수도 있고 막히게 할 수 있음을 다시 되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