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해! 짜증 나.”
전화를 받자마자 딸의 짜증이 들렸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햄스터가 집을 탈출했다는 이유이다. 보이지 않는다며 걱정이 태산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답답했으면’이라고 햄스터의 자유를 생각했다. 좁은 통 안에서 종일 혼자 생활하는 햄스터. 딸이 보기엔 넓어 보이는 집일지라도 햄스터는 답답하지 않았을까. 호기심 많은 녀석은 넓은 곳을 질주하며 탐색하고 싶었을 듯하다. 햄스터가 제집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딸의 걱정을 들으며 혼자 상상을 펼쳤다. 답답함을 경험한 사람의 입장이었다.
며칠 뒤, 겨우 잡았다며 전화가 왔다. 어디에 있었냐고 물으니 유인하기 위해 놓은 먹이통에서 찾았다고 했다. 먹이에 머리를 쑤셔 넣고 정신없는 틈을 타서 잡았다며 “걱정했다”부터 시작해서 또 나가면 안 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햄스터는 알아듣지 못할 텐데. 꼭 나한테 하는 잔소리처럼 들렸다. 잔소리 그만하라고 하면, 잔소리가 아니라며 짜증 낼 테니 말이 끝날 때까지 듣는 척하며 딴생각을 했다.
잔소리는 듣기 싫은 말이다. 사랑이 담긴 말이라도 듣는 사람 귀에 거슬린다면 잔소리가 된다. 내가 말할 때는 몰랐는데 딸의 얘기를 들으며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과거의 나를 돌아봤다. 상처가 되어 가슴에 담긴 말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답답할 때 말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말을 삼키고 감정을 얼굴에 비치기 일쑤였다. 감정이 태도가 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답답하고 짜증 날 때면 담아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가슴을 콕콕 찔렀다. 쏟아내지 않으면 병들 것 같아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면 과감히 과거의 상처를 보였다. 뒤에서 말을 한다고 상처가 낫는 것도 아닌데 멈추지 못했다.
가슴에 담은 말은 편한 사람 앞에서 쉽게 흘러나왔다. 듣는 사람에서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들을 때는 잔소리였는데 말할 때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잔소리가 많았구나’ 절대 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오히려 수도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가족이 들어오면 화장실 들어갈 때까지 씻으라고 했던 순간들, 방바닥에 어질러진 옷을 보며 혀를 끌끌 차며 한숨 쉬던 순간들. 시간이 지나서 보니 모두 소중한 시간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며 쉽게 한 말들, 챙겨준다며 한 마디씩 보탠 내 소음. 딸의 잔소리는 내가 뿌린 씨앗이었다. 엄마의 언어 습관을 닮았을 것이다. 씨앗이 성장해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나를 돌아보게 해 주었다. 간장 종지만 한 그릇이 출렁거리자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쉽게 말하던 나. 습관처럼 나오는 참견을 멈추고 이제라도 편안한 대화를 하고 싶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한 호흡 멈추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잔소리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감정에 따른다. 듣기 좋은 노래도 기분과 상황에 따라 멜로디와 소음으로 나뉘는 것처럼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은 잔소리였다.
잔소리와 조언의 분기점을 찾고 싶다. 나무 한 그루도 동쪽에서 보느냐 서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의견이 다르듯이 어쩌면 조언은 타이밍 아닐까. 말하고 싶은 타이밍이 아니라 기다려주는 타이밍. 내 시선으로만 바라보거나 주장하지 않고 질문받을 때까지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이다. 말을 하고 싶어도 분기점에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내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밥 먹어”라고 챙겨주는 말이 듣는 사람에게도 사랑이 되려면 “배 안 고파” 또는 “귀찮아”라는 말 다음 툭 튀어나오는 “다시 차리면 귀찮으니 먹을 때 같이 먹어!”라는 말을 참아야 한다. 먹는 자유는 상대에게 있다.
내 역할만 하고 한발 물러서면 모두가 편안한데 그러지 못한 이유는 왜일까.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을 듣기 원하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 아니었는지.
햄스터의 가출 덕분에 잔소리와 조언을 고민한 날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