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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 Sep 13. 2023

중2병에 무너진 지적 허영심

  아이들과 영어책을 읽으며 가장 큰 위기가 왔다. 이번에 고른 책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였다. <노인과 바다>는 나도 그때까지 끝까지 읽지 못했던 책이었다. 원서 기준 127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인데도 끝까지 못 읽었던 건 도무지 공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도무지 왜???’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대체 왜 이 책을 읽고 있는 건 가’에 대한 의문으로 연결되어 책을 집어던지곤 했다. 비슷한 문장과 내용의 반복, 이에 따른 지루함, 무엇보다도 낚시라는 행위에 대한 이해 부족도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었던 이유일 거다. 그런데 왜 이제 중학교 2학년인 아이가 읽을 책으로 이 책을 선택한 걸까?

첫 번째 이유는 나의 지적 허영심이었다. 책을 같이 읽은 지 어느덧 3년이 다 되어가니 이제 노벨문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대문호”의 책을 읽을 때가 되었다는 느낌이 왔다. 아이의 지적 허영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이에게 이제 이런 책도 읽을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고 독서 리스트에 헤밍웨이의 책을 넣어주고 싶었다. 두 번째 이유는 아이의 성취감이었다. 읽는 과정은 힘들겠지만 읽고 난 후 헤밍웨이의 책을 읽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겠지. 무엇보다도 아이가 이제 이 정도는 읽을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자신감이 가장 컸다. 아이도 얇은 책을 보며 금방 읽겠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시작은 다행히 예상보다 쉬웠다. 첫 몇 페이지는 문장도 길지 않고 내용도 단순해서 어렵지 않게 읽었다. ‘조금 지루할 수 있다’라는 경고가 무색하게 잘 읽어 나갔다. 30 페이지쯤 되었을 때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본격적으로 노인이 바다에서 고기를 낚으러 노력하는 장면이 시작되었다. 배의 형태와 낚시하는 장면 등을 묘사한 단어와 문장이 많이 나왔다. 보통은 이런 문장을 보며 그 장면이 떠올라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낚시를 해봤어야 그림이 그려질 텐데… 나는 한 번도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는 내용은 검색해 가면서 설명해주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검색을 하고 참고지식을 읽어봐도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는 장면들이 많았다. 설명을 듣고 그림을 떠올리며 내용을 이해해야 하는 아이는 당연히 더욱 모호하게 느껴졌을 거다. 그러다 보니 노인의 감정이나 행동이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주인공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니 책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문장은 어찌나 길던지... 한 문단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긴 문장들이 많았다. 한 페이지에 단 2~3 문장만이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고기가 낚였는데도 신이 나기는커녕 점점 지루해졌다. 

재미없다. 읽기 싫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등의 부정적인 말이 늘어갔다. 

“이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야.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이니,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여전히 시큰둥했다. 

“언젠가 됐든 한 번은 꼭 읽어야 하는 작품이야. 이 책을 영어로 읽는 중학생이 얼마나 있겠니? 

다 읽고 나면 네가 정말 자랑스러울 거야. ^^”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했다. 한숨을 쉬기는 하지만 수긍하고 넘어가는 듯했다.

“이거 꼭 읽어야 돼요? 그만 읽으면 안 될까요?”

급기야 그만 읽자는 말까지 나왔다. 이제 겨우 반정도밖에 안 읽었는데 말이다. 앞으로 나올 내용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답답했다.


책 외부에도 문제가 있었다. 전에 없이 수업 태도가 나빠졌다. 내용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말보다 ‘똑바로 앉아라’, ‘졸리면 세수하고 와라’, ‘집중해라’ 등 태도를 지적하는 말이 더 많아졌다. 재미없는 책을 억지로 읽고 있다는 생각에 중2 특유의 불량한 태도까지 겹쳤던 것 같다. 책 속의 노인이 상어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지훈이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며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너무 큰 욕심을 부렸던 것 걸까? 이러다가 영어 자체에 대한 흥미까지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나도 점점 지쳐갔다. 너무 힘들면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다. 억지로 끌고 가봤자 둘 다 힘들 뿐이다. 지훈에게 한 시간 더 읽어본 뒤에도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하자고 했다.

이렇게 나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욕심은 중2병으로 인해 무너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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