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40
상담일이었다. 그래도 한번 가봤다고 조금 더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두 번째 방문일에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대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온 중고등학생들도 몇 보였다. 성적이야기를 하니 아마 집중력 관련해서 온 것 같았다. 여기 근처 정신과의 대부분은 아이들 집중력 향상으로 인해 성적이 오를 수 있다는 타이틀을 많이 걸고 있었다. 아니면 성인 ADHD라던지.
이번에는 다른 검사 없이 바로 상담을 시작했다. 사실 약을 먹은 후 뭔가 개선되었다는 느낌은 조금 있었으나, 약 때문인지는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연말은 많은 약속들이 있는 날이었고, 이로 인해 나는 혼자 있을 시간이 적어졌다. 지금까지의 나의 지면을 파고 지하로 들어가는 생각의 문제는 혼자 있을 때 대부분 발생했기에 그래서 우울감이 조금 줄어든 감은 있었다. 하지만 홀로 집에 가는 길에는 배 이상으로 나를 아프게 했다. 그래도 조금은, 정말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
의사는 내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지만 약속에서 술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회식, 지인들 혹은 전 직장 사람들 모임, 친구들 등등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아졌다. 이중 한번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날이 있었다. 우울의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대화를 많이 했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 뭔가 해소된 느낌이 들었다. 고민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든 느낌. 갸우뚱하는 의사의 반응을 느꼈을 때 일반적인 반응은 아닌 것 같긴 했다. 술을 마시면 원래 증세가 더 심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나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지만, 집에서 혼자 마시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고 그 좋은 알딸딸한 기분보다는 다음에 올 후폭풍이 더 싫었다. 속이 뒤집어지고 물을 마시거나 혹은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그런 것들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마시고 싶어 하지만 굳이 혼자서 마시지는 않았다.
물어보았던, 회사 생활은 같았다. 일할 때 일했고, 회식은 평소와 같이 술을 마셨다.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적성에는 맞을지 몰라도 일 자체는 나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은 일이고 그냥 돈을 벌어다 주는 수단이기에 하는 것일 뿐 이 일에 대해 아무런 열정은 없었다.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일 뿐. 이 일이 나의 삶에 대해서 절대적인 가치나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더 나은 벌이가 있다면 미련 없이 버릴 일이었다. 그래서 일은 나에게 기쁨이나 보람을 주지 않았고 일이 어긋 났을 때의 스트레스만 줄 뿐이었다. 그리고 월급도.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밥은 여전히 잘 먹고 있으며, 오히려 잦은 식욕 때문에 문제였다. 맨날 마시는 카페인 음료들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의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은 하나의 주요 이유가 없다는 것이며, 때때로 너무 많은 이유들 때문에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이유가 많아 문제가 아닐까? 무언가 하나를 콕 집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의 우울은 명확한 이유가 있는 우울이고 이는 우울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냥 우울증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고 유난인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나를 믿지 못했다. 그건 의사가 판단할 일이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지만 혹시 정신과 의사들도 돈을 벌기 위해 나를 우울증에 가둬놓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의사분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확신하지 못해서였다. 나는 의문이 들어도 나의 생각보다 타인의 의견을 더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다음 예약일은 3주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