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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덤

자살이 허기진 밤 #044

by G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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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감정기복은 없었지만 더 없어졌다. 나의 감정기복은 기쁨이 아니라 한없이 가라앉는 데 있었다. 우울하거나 무표정이거나. 하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 기대도 미련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복용하는 약 때문인가 싶지만 꼭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먹었던 약에 대해 효능을 느낀 적은 없었으니까. 이제 나의 흥미를 끌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체가 살아있다면 이런 감정일까. 우울증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제정신이다.


그니까 나는 미래에 나에게 해줄 말이 없다. 만약 50년 뒤에 나를 만난다면 오히려 감탄할 것 같다. '오 아직 살아있었구나?' 하면서. 나의 최근 활동은 달리기나, 요가도 하고 가끔씩 간헐적 단식도 한다. 살이 많이 찐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나는 건강하게 살다 건강하게 죽고 싶은 거지, 자살하고 싶다고 해서 몸을 망가뜨리고 싶진 않다. 아픈 건 싫으니까. 그러나 어쩌면 나의 삶의 끝은 부모님과 같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에 슬퍼하진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다.


여행은 한때 나의 낙이었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도 길게 풀어써 보고 싶다. 하지만 이도 덤덤해졌다. 최근 해외에 나가서는 힘들고, 무겁고, 땀나고, 귀찮기만 했다. 궁금했다. 휴가를 쓰고 여행을 와서인지, 아니면 퇴사를 하고 여행을 가면 다른 느낌인지. 죽기 전 돈을 다 쓰고 죽을 거니 한 번쯤은 기회가 있을 수 있겠다.


이런 내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건, 나를 버린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때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석되고 희석되어 아무 감정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딱지도 붙지 않은 사람들도, 큰 흉터를 남긴 사람들도 있다. 비가 오면 통증이 있듯이, 지금으로서 비 오는 관절통은 아마 평생가지 않을까 싶다. 문득이었다. 문득. 그 찰나에 문득, 슬퍼했다가 잊었다가 화가 났다가 잊었다가 지금은 증오한다. 웃으면서 욕을 할 수 있다. 나는 사람에 대한 욕을 하지 않는데 너한테는 그럴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나는 아직도 이별하는 순간에 살고 있다. 그래서 기쁠 일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건드린다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커피를 마셨더니 속이 쓰렸다. 회사에서 매일 한 잔씩 마시는 커피였으나 이제 그 한잔도 다 마시지 못해, 버리고 말았다. 젤리를 먹었더니 복통이 일어났다. 몇 년 동안 걸리지 않았던 장염도 최근에 겪었다. 흔히들 정신과 육체는 같이 좋아지거나 망가진다는데, 나는 둘 다 망가진 듯싶었다. 점점 삐걱거리는 몸, 망가진 정신. 이제 내게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다.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타의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내게 거친 사랑은 액션영화와 같아서 큰 스크린으로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이제 경험하지 못한다. 나는 생을 어떻게 하면 타인이 아파할지 생각해 온 사람이다. 비록 실천으로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런 생각만 하던 나에게 사랑은 사치겠지. 그래서 때때로 나를 버린 사람들에게 감탄한다. 어떻게 나의 본질을 알고 탈출했지?


이제 전처럼 이상한 생각에 잡혀 잠들지 않는다. 그냥 자고 일어날 뿐. 최근 꿈을 많이 꾸고 있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일어나면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말한다 '상쾌한 아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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