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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고통스러운 여행의 의미

자살이 허기진 밤 #054

by G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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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여름, 혼자 경주를 간 것이 어쩌면 첫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편의점에서 번 돈으로 왜 경주를 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이와 다름없어서 숙박시설도 찾지 못해 찜질방에서 잠을 청했고, 버스 하나 타기도 두려웠었다. 다행히도 경주에서 유명한 유적들을 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에도 고되다 생각한 나는 계획보다 빨리 서울로 되돌아갔다. 그게 나의 첫 여행이었다. 전역한 후, 친구들과 유행했던 일주일간의 내일로 여행이 그다음이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을 시작으로 유명하지 않았던 여수, 전주 등을 거쳤다.


이후 내가 계획을 짜고 가려고 했던 건 군대를 다녀온 후 친구와 함께 계획했던 약 1달간의 유럽 여행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후 나의 여행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세상이 신기하고 신비하게 느껴졌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의 소통, 새로운 환경, 책에서만 보았던 것들이 실제 앞에 있는 등의 경험들은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늘 툴툴거렸다. 가져간 사진기가 좋았다면, 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돈이 조금 더 많았더라면, 많은 걸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영어를 조금 더 잘했더라면, 다른 사람들의 재밌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소소한 툴툴 거림들.


다시 한번 불편함을 느끼고 싶었다.

잘못 예약한 기차를 보내고 어찌하나 발을 동동 굴리던 그때의 막막함.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의 신선함, 혹여 매력적인 사람을 만날 때의 그 설렘까지도 나는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물론 그곳의 문화나 건축, 생활을 느끼는 건 당연하고.


함께 갔던 친구는 아니었지만 나는 다시 여행을 갈망했다. 나의 주변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꽤 있어서 영향을 받은 탓도 할 거다. 언젠가 다시 가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왔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는 휴학했다. 휴학 후 내가 시작한 건 아르바이트였다. 집 근처 조금 큰 호프집에서의 홀 서빙을 담당했다. 10시 이후시간대가 있어서 급여도 꽤 괜찮았고, 가까웠다. 그곳에서 1년 동안 일을 하며 나는 세계여행을 떠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나는 그대로 추진했다. 약 4개월간의 해외여행 일정이 세워졌다. 이 긴 기간 동안 나와 함께 다닐 사람은 없었다. 홀로 여행하는 셈이었다. 그 점이 조금 두려웠지만 그만큼 설레기도 했다. 유럽과 일본에서의 2달, 동남아에서의 2달 계획을 실행했다.


그렇게 4개월의 여행이 끝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 삶은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의 삶의 목적은 여행이 되었다. 나는 늘 바다 밖을 나가는 것을 갈망했다. DSLR을 가지고 4개월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 하루하루 기록해 나간 나의 일기들, 차곡차곡 모아둔 나의 여행의 흔적들을 모아 엽서를 만들었고 책을 출판했다. 나는 언젠가 여행을 업으로 삼을 거야 라는 마음을 먹으면서.


이후 나는 베트남을 1달 동안 여행하기도, 세부를 일주일정도 여행하기도 했지만 나의 성에 차지는 않았다. 나는 더 길게 나가길 원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포기할 것들이 많았다. 나의 관심사에서 직장은 멀어졌다. 물론 돈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록하고 여행 갈 돈만 있으면 충분했다. 또한... 연애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이성이 있다면 좋겠지만, 안정성을 버린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여자는 없었다. 나는 꿈을 조금 더 끌어안은 대가로 사람들과 미래에 만날 사람들을 버렸다.


꿈은 아직 놓진 않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내 주변 사람들은 점점 나의 생각을 알고 떠나갔다. 나의 생각을 바탕으로는 도저히 좋은 남편감이 될 수 없었다. 나는 망상만을 쫓아다니는 그런 존재. 미래 따윈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건 나의 삶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좋은 직장을 찾아다닐 노력을 하지 않아서 나는 어중간해졌고, 돈도 벌 수 없었다. 코로나가 터져서 당분간 해외에 나가지 못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도태되었다.


여행도 한철이라 다양한 여행 유튜버들이 생겨나고,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해외를 볼 수 있으며, 쉽게 여행에 간 것처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AI까지 등장하여 나의 꿈의 가치는 점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원동력이었단 여행에 대한 관심도 사라지고 있었다. 외로웠다.


나는 나의 삶이 바라는 안정감과 싸워야 했고, 삶은 이러해야 한다는 사회적 시선과도 싸워야 했고, 그러면서도 나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불태워야 했다. 하지만 나도 이제 지쳤다. 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사명 같은 게 생겨버리고 말았다. 꼭 세계 여행을 하겠다는. 이제 이건 흥미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동안 이러한 것들을 포기한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여기서 진다면 나는 늘 도태된 인간으로 살아야 한 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도전한 이후에도 문제였다. 나는 나의 삶의 기반을 던져버리고 출발한 것이었다. 나는 망해버린다면 도저히 다시 살 자신이 없었다. 나는 떠나지 않으면 지리멸렬한 삶, 떠나는 도중에는 잠깐이나마 선망되는 삶, 귀국 후 망가진다면 역시 저럴 줄 알았다는 경멸의 본보기가 될 삶. 이거밖에 남지 않았다. 이 생각만 하면 현기증이 났다. 토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점차 죽음과 가까워졌다. 나를 안정시켜 주는 단어는 "죽으면 그만이지."이라는 한 문장 . 그게 나의 삶의 지침이 점차 되고 있었다. 죽음을 가볍게 생각해야 나는 도전할 수 있었다. 삶을 가볍게 생각해야 걸을 수 있었다. 재밌게도 생각은 무거우나 삶에 대한 태도는 가벼워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었다.


아직도 다들 나를 망상가. 꿈에 취해 현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이 즐거워서 가는 것이라고. 아니 나는 이제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감정과, 지독한 증오가 함께 존재했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함께 생각하는 것들이 부딫히기에, 여행은 내게 고통스러운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젠가 떠나야 한다. 카우보이 비밥의 한마디가 나의 생각과 같았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내가 정말 살아있는지 어떤지… 확인하러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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