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산 아래 흔적

자살이 허기진 밤 #057

by GSR

KakaoTalk_20250424_112221458.jpg


세네 겹 겹쳐 입던 우리가 점차 한 겹씩 벗어가고 있다.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까닭이었다. 지금은 패딩을 입고 있지만 다음 주에 반팔 입고 에어컨을 틀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잘 입었던 플리스 혹은 후드들을 세탁한 후 꺼내어보지 않고 있다. 이대로 봉인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성큼 다가온 셈이었다.


점점 비가 온 것을 체감하는 건 역시 날씨였다. 며칠 전에도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주말마다 비가 내린다고 투덜거렸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레인부츠를 신고 젖은 우산을 복도에다가 펼쳐놓는다. 젖은 바지 밑단을 툭툭 털어내며 각자의 자리로 와서 앉는다.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야외로 나가서 이야기를 하면 비 오는 날을 대부분 싫어한다. 활동이 제한되고 약속한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니까.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비 오는 날마다 밖으로 나가서 물놀이했던 기억, 비 오는 날 어머니와 함께 택시로 이동할 때 맡았던 습기 찬 꿉꿉한 냄새 그리고 투투 툭하고 앞 유리에 쏟아지는 비들과 열심히 움직이는 와이퍼. 겉은 젖었지만 옷 안은 체온으로 인해 따뜻했던 그 오묘한 느낌.


물론 비는 우리를 제한적으로 만들지만 그 사이에서도 이야기는 피어난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려고 우산 들고 머뭇거렸던 기억. 비가 내일 수록 함께 우산을 써야 하니 더 붙어있을 수밖에 없던 우리. 일 년 중 비가 내리는 날은 무척이나 적고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압축된 기억을 풀어버린다. 오늘이 맑은 날이라고 하여 맑은 날의 추억을 기억하진 않지만, 비 내리는 날은 비 내린 날의 추억을 기억한다.


이제 그때와 같은 설렘이나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은 사라졌지만 나는 그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창문을 노크하는 빗소리들이 좋다. 비 오는 날 걸으며 사람 구경하는 것도,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직접 비를 느껴보는 것도 좋다. 종종 비 오는 날 조금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카페에 가곤 한다. 그곳에서 밖을 보며 책을 읽는 건 나의 또 다른 사치.


봄이 끝나가는 날엔 비가 내린다. 따뜻해지는 기온에 제동을 걸듯 점차 추워지지만 다시 더워질 것이라는 걸 안다. 축축해진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비가 내리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이제 곧 다가오는 건 긴 장마. 사람들은 절망하지만 나는 오히려 좋다. 살짝씩 내리는 비보다는 많이 내리는 비가 좋다. 그것이 더 나의 감정을 극대화시켜 주니까. 비야 와라 더 많이 와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