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56
일 년에 두어 번쯤, 새로운 해가 시작할 때 그리고 생일 즈음. 우리는 무심히 툭,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때,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 그런 시점에서의 연락은, 의무가 된다.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끝에 가서야 툭 건들게 되는.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에 가고, 퇴근 후에는 집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삶. 단순하지만 틈 없는 일상에서 어느 누가 비집고 들어와 안부 하나 물어줄지 모른다. 때때로 아무 이유 없이 안부를 물어볼 수 있을 때, 나는 어이없게도 타인에게 기대를 걸곤 한다. 친구들, 대학교 동기들, 전 회사 사람들 혹은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 이중 나와 연락을 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연락을 주는 것이겠지. 내가 감히 줄 수 없는 그런 틈을 쉽사리 만들 수 있는 사람들만이.
내가 먼저 대화를 거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나지만,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주었을 때, 나는 대화의 틈을 필사적으로나마 이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주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이 늘 좋은 결과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때때로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연락을 주기도 했다. 나는 늘 그런 연락에 대해 감사했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고 나는 밝은 모습으로 대응해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미치도록 바랬던 연락은 내 삶에서 한 번도 오지 않았다.
24시간을 기다려도 그대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 때, 나는 또 한 번 나의 태도를 반성한다. 왜 나는 연락을 오게 할 만큼의 사람이 아닌 건지, 역시 나는 한 발자국 떨어져야 가장 좋은 사람인건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내가 오래 연애를 하지 못한 건 그런 실속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거라고 확신한다. 무거움과 가벼움, 나는 어디에 치중되어 있는 삶인가. 그리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는 한없는 무거움, 조금 떨어진 타인에게는 한없는 가벼움. 그리고 나의 사람에게는 무관심. 선택을 넘기는 건 애정이 아니라 책임을 전가하는 걸까? 방법의 차이인 걸까?
가벼움, 무거움. 극단적으로 치우친 건 아무짝에도 도움 되지 않는다.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태도를 바꿔 가는 것을 하지 못하고 익숙한 것을 더 쉽게 선택하게 된다. 당신은 나를 이해해 줄 수 있겠지 라는 근거 없는 확신만으로. 당신은 나에게 가벼움을 보고 다가왔으나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무거움 뿐. 그러기에 나를 떠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겠지.
무거움은 약점이었다.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해도 가벼운 태도는 흘려 넘길 수 있었으나 무거움은 진지로 귀결된다. 진지함은 그 생각이 삶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런 건 상대를 피곤하게 한다. 가벼움은 쉽고 빠른 반응, 무거움은 침묵과 기다림.
무심히, 아니 무심한 태도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툭 본다. 조용하다. 미련을 가지고 계속 보는 건 시간을 더디게 할 뿐. 나를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생각하는 건 낭비, 하등 쓸데없는 행동. 아쉬운 건, 합리와 감정은 다르다는 것. 길을 걸을 수 없다면 길을 없애는 것이 맞을까? 길을 보면 한 번쯤은 걷고 싶어 할 수 있으니. 길을 없애면 단념할까? 새로운 길을 찾을까? 비효율적일까. 효율적이지 않기에 사람이고, 그보다 더 비효율적인 사람이 나였다. 과거를 생각하지 말라는 의사에 말을 듣고 더 깊게 파고들고,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을 듣고 과거에 집중한다. 나는 연비가 좋지 않은 구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길을 없애는 것처럼 나는 내 안의 어둠이 들어오지 못하게 통로를 없애야 할까. 아니면 내 안의 비효율을 끌어안고 가라앉아야 할까? 무엇이 옳은지, 나다운지 나는 모른다. 그저 기다림이 조금 더 편하고 고통스럽다는 것만 알 뿐. 고통을 없애려고 하는 행동 모두가 나를 이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점차 깊숙하게, 깊숙하게 가라앉아야 하는 것일까. 그게 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