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58
남자 고등학교를 나온 탓이었을까? 이성을 만나기란 퍽 힘든 일이었다. 몇몇 애들은 학원에서나마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때의 학원들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편하게 교과서별로 분류하였다. 결국 학교에서 본 애들이 학원에서도 똑같이 볼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친구들은 중학교 때 알던 여자애들에게도 고백을 종종 하였고, 친구들을 동원하여 양초로 길을 만들곤 하였다. 하지만 성공한 적은 보지 못했다. 그저 참여했던 친구들에게 평생 안주거리 하나 제공해 준 셈이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있는 고등학교 축제를 준비할 때에 가끔 마주칠 수 있었다. 여고에서 우리 학교 교문 앞에서 본인들의 고등학교 축제 홍보차 인사해주곤 했다. 남고였던 우리는 휘파람을 불거나 환호성을 질렀다. 축제가 시작할 때도 여자애들은 우리 학교에 많이 방문했고, 동아리 공간에서 방명록을 남겼다. 각 동아리 애들은 얼굴도 모르는 번호가 적인 노트를 몇 장씩 찢어가서 남몰래 문자를 보내곤 하였다.
이성을 만날 일이 없으니 열렬히 사랑한다는 감정을 잘 모르긴 했다. 나는 그때 이성에 대한 생각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실제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연예인들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조금 관심은 가질 뿐이었다. 알지도 모르는 연애를 사치라고 하니 나는 그냥 모르고 말았다. 그런 시기를 보내며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교에 입학식도 하기 전, 입학이 확정된 신입생들만을 모아서 먼저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는 일명 '00학번 신입생 모여라'라는 카페들이 만들어지고 오프라인 모임을 시작할 때였다. 한창 싸이월드가 유행할 때여서 사람들은 이런 카페에서 100문 100답 같은 자기소개를 하고 몇몇은 일촌을 하며 벌써부터 친해지고 있었다. 나는 용기가 없어 그러지는 못했지만 삶에서 한없이 무료함을 느끼는 중이어서 한 번쯤은 참여해 볼 만하겠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블랙데빌을 처음 만났다. 이제 성인 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보니 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이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챘다. 우리는 겨우 성인이 된 지 2달 정도 되었을 뿐이었다. 6~8명 정도 선배와 신입생이 함께 동그랗게 모여 앉아 술을 마셨다. 함께 통성명을 했고 대략적인 학교 생활이나 맛집을 알 수 있었다. 2차로는 근처 술집으로 옮겨서 이야기했다. 처음 술게임이라는 것을 접했고 FM이라는 조금 거친 자기소개방식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여기저기 술에 져버리기 시작한 사람들이 등장했고 다양하게 발현되었다. 자는 친구, 화장실에서 사라져 버린 친구 등이 있었지만 얘는 난동을 부렸다. 부축해 준 남자애들을 때리면서 블랙데빌을 달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때 블랙데빌이라는 비싼 담배가 있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장면이 퍽 인상 깊게 남았다.
이런 모임은 3~4차까지 계속되었지만 나는 2차 정도 나간 후 가지 않았다.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게임을 하는 게 더 재밌었다. 아참 두 번째 나갔을 때쯤 블랙데빌하고도 번호를 교환했었다. 언제 즈음인가, 친구과 한창 피파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블랙데빌에게 뜬금없이 문자로 고백을 받았다. 나는 얼떨떨하게 받은 후 거절했다. 외모가 취향이 아니었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싫었다. 특히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는 게 싫었다. 이후 등교 때 몇 번 마주친 것이 다였다.
같이 수업을 듣기 시작하니 나도 함께 밥을 먹고 돌아다닐 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논 셈이었다. 남자 5명, 여자 5명. 그때는 나름 꽤 재밌게 놀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무 미련 없는 인연들이지만. 이중에서도 나도 좋아하는 이성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자주 부대끼고 다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때의 나는 용기를 내어 단둘이 만나자고 말했었고 우리는 방학 때 몇 번 만나기도 했다. 10명이서 같이 놀러 갔을 때 그 애가 내 다리를 베고 누우며 밤 별을 보기도 했었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무리는 또 있어서 다른 친구들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우리 모임에 있던 다른 남자애와 사귀기 시작했다. 나의 짝사랑을 알고 있는 애여서 나는 그 남자애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철없을 때 일이었지만 사실 지금도 그 남자애를 싫어하는 감정밖엔 없다. 뭐 볼 일은 없지만.
1학년을 마치고 나는 입대할 준비를 했다. 학과 동기와 함께 동반입대를 신청해 놓았다. 입대는 3월 중순즈음. 그전까지 우리는 게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만, 학과에서도 신입생이 들어오니 행사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입학식 등 가끔 가긴 했다.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긴 했다. 우리가 전역할 때쯤 지금 입학하는 애들은 3학년일 테고 나는 2학년으로 복학하니까. 한 번도 같이 수업 듣고 마주칠 일 없는 사람들이라 딱히 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나는 입학식에서 후배 한 명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도 나와 집이 가까운 친구였다. 그 이유였을까? 우리는 가끔 만나서 놀곤 했다. 밤늦게까지 만나는 일은 내게 드물었지만 이 친구와 함께 놀 때는 밤까지 놀았던 것 같다. 입대 직전 머리를 반삭 할 때도 혼자 가면 외로울 거다 라며 함께 가주었다. 나는 이 친구가 참 기억에 남았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마지막일 줄은.
이 후배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건 이등병 때, 함께 동반입대한 친구에게 들었다. 이등병끼리는 말을 하는 게 금지되었던 부대였지만 친구는 청소하고 있는 내게 몰래 다가와서 말해주었다. 나는 그 이후 멍 때린 채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원래 몸이 약한 애였다. 우리 학과가 몸을 쓰거나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거기다 동아리 생활을 하니 지병이 악화되어서 그런 상황이 생긴 거라고. 내 한학번 위에 선배를 사귀었으나 죽음 이후 바로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지금 히히덕거리며 있다는 말을 들었다.
때때로 생각한다. 내가 좋아했던 친구가, 한낱 낡은 이야깃거리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사람이었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 때.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전역한 후, 그 친구가 있는 납골당에 홀로 가볼 뿐이었다.